이상하고도 사랑스러운 세계에서
처음 '정세랑'이라는 이름을 들은 건 오 년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책이 아니라 TV였는데, 생각 없이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려 재끼다 '유퀴즈'에 고정되었지. 작가가 TV에 나오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니까. 알고 보니 '보건교사 안은영'이라는 넷플릭스 드라마의 흥행으로, 원작자라 다소곳이 앉아 계셨나 보다. (그러고 보니 그 드라마는 지금까지도 안 보고 있는 건 무슨 객기인가...) 드라마가 제법 화제를 모았었으나, 나는 그보다 '등장인물은 친구나 주변 사람 이름'을 종종 쓰고 '악당 이름을 스팸메일함'에서 찾는다는 작가의 이야기에 귀가 쫑긋했더랬다. 심지어 '소설을 잘 쓰는 비결'이 뭐냐는 물음에 '당연한 것이 당연한가' 의심해 보는 것이라 답하는 작가를 그냥 넘길 수가 없더라.
인터뷰 내내 그녀는 무해하고 다정한 세계에 대해 이야기했고, 사람이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는 이야기, 이상하지만 따뜻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말했다.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수십대의 카메라와 유재석을 앞에 두고 저렇게 또박또박, 자기만의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래서 책을 찾았지. 그러다 보니 어느새 그녀의 문장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 있다.
그리고 금세 알았다. 이상하리만치 복잡한 세상에서도, 이상하리만치 선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선의는 무기력하지 않고, 오히려 더 단단하다는 것을. 정세랑의 세계는 늘 그렇게 부드럽게 설득해 왔다. 사람은 여전히 믿을 만한 존재라고, 기이한 현실 속에서도 사랑은 지속될 수 있다고. 괴물 같은 일상에 맞서 싸우는 평범한 사람들, 손바닥으로 총구를 막는 사람들, 아무것도 아닌 말과 행동으로 누군가의 절망을 끌어올리는 사람들의 이야기. 이상하고도 사랑스러운 세계에서,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아니, 정세랑은 그 ‘살아간다’는 말에 조금 더 용기를 덧붙이는 방식으로 세계를 그려왔다 생각한다.
그리하여 제일 먼저 집어 들었던 게 『피프티 피플』이라는 소설이다. 제목처럼 정말 피프티 한 피플이 등장하고(정말 세어 본 독자들이 있는 듯한데, 오십 명이 넘는단다), 그들의 직업은 간호사, MRI 기사, 제약회사 영업사원, 응급실 환자, 닥터헬기 조종사 등으로 다채롭다. 처음에는 이토록 다양한 이야기가 하나의 소설 안에 담길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병원을 중심으로 얽히고설킨 이 이야기들이, 시대의 불편함을 꼬집으며 하나의 커다란 공동체적인 서사로 수렴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설 속 사람들은 대부분 서로를 모른다. 어떤 인물은 다른 인물의 배경으로 스쳐 지나가고, 어떤 인물은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정도의 인연에 그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서로에게 파장을 남긴다. 낯선 타인의 존재가 내 삶에 스며드는 방식, 그것이 『피프티 피플』의 결이다.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 중 하나. 남편을 불의의 교통사고로 잃은 여성이 있다. 사고를 낸 것은 25톤 화물차였고, 그녀는 그 뒤로 일상적인 사물과 마주치는 순간마다 비극을 떠올리며 살아간다. 그런데 우연히 그가 속했던 화물연대의 집회를 마주하고, 자기가 먹으려던 샌드위치를 그들에게 건넨다. 설명되지 않는 이 감정의 흐름—억울함, 분노, 체념, 그리고 어떤 연민. 이 모든 것이 정세랑의 문장에서 말없이 떠오른다. 슬픔이 응어리지는 방식이 아니라, 스며드는 방식으로.
작가는 인물에게 함부로 긍정을 심지 않는다. 동시에 참담한 절망에도 빠지게 하지 않고. 우리가 매일을 버티며 살아가는 그 사이의 공간에, 조금은 무기력하지만 여전히 사람을 향해 있는 마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이 이 소설이 아름답고도 위대한 이유이지 않나 싶다.
이 세계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고통받고 있다. 상처 입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누군가의 상처에 무심하지 않다. 아주 작은 말 한마디, 아주 짧은 시선으로도 서로를 붙잡는다. 그건 위로를 잘해서가 아니다. 같은 고통을 견디고 있다는 연대감이며, 이해가 아니라 감응이라는 방식으로 다가가기 때문이다. 이야기 끝마다 '우리는 결국 서로의 징검다리가 된다'는 작가의 믿음 같은 것이 느껴진다. 그 믿음은 작가가 세상을 보는 눈이자, 우리가 이 소설을 통해 회복하게 되는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피프티 피플』을 보고 나서 주변의 낯선 사람들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침묵으로 함께 오르는 주민, 편의점 계산대 너머에 이어폰 꽂은 점원, 흔들리는 지하철 옆자리에 앉은 누군가. 그들도 각자의 이야기를 짊어진, 소설 속 누군가일 수 있겠다는 마음. 정세랑은 말하지 않지만 알려준다.
우리는 모른 척하지 않아도 된다고.
우리는, 서로의 어려움을 건너는 징검다리가 될 수 있다고.
정세랑의 이야기를 읽고 나면, 희한하게 주변의 누군가를 떠올리게 된다.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내일은 나이 질거라 서로의 등을 토닥이던 동기, 30대 초반에 나보다 먼저 퇴사를 결심했던 선배, 피치 못 할 사정으로 회사를 그만두어야만 했던 후배까지.
나는 옥상에 올라간 적이 없다. 뛰어내릴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간 단단한 마음가짐으로 삶에 만족하며 살아왔다는 뜻은 아니다. 삶의 모서리는 생각보다 예리하고, 우리는 가끔 그 앞에서 스스로를 보호할 방법을 몰라 당황하곤 하니까.
정세랑의 『옥상에서 만나요』를 읽으며 그 옥상이 반드시 고층빌딩의 꼭대기일 필요는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작가는 주인공을 통해 말한다.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싶다는 충동을 매일 느낀다'라고. 그런데 그런 주인공을 지탱해 준 건 다름 아닌 다정한 언니들의 말과 존재, 그리고 주술처럼 물려받은 ‘비급서’였다.
주술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어쩌면 우리 모두는 각자의 방식으로 그런 다정함을 건네받고 살아가는 건 아닐까. 회의 뒤에 주고받는 사소한 스몰토크며,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고 건네는 눈인사,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내 어깨에 기대어 졸던 누군가의 무게 같은 것들. 의도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전달되는 신호.
버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 네가 견디는 걸 보고 있어.
『시선으로부터,』는 그 다정함이 세대를 건너는 이야기다. 심시선 여사에서 시작된 연대의 서사는 딸과 손녀들에게 이어지고,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에 맞선다. 그것은 투쟁이라기보다 윤리적인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한 고집에 가깝다. 누군가의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불합리함을 지나치지 못하며,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
구체적으로 이해되지 않아도 다만 같은 방향을 향해 서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 이런 사람들을 보며 위로받는다. 정세랑이 말하는 연대는 그래서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조용한 마음 씀에 가깝다. 이해보다는 감응을, 설명보다는 곁에 있음을 이야기한다. 다정함이 어떻게 연대가 되는지 나는 아직도 완전히 설명할 수 없지만 그 다정함을 한 번이라도 받아본 사람이라면 안다.
그것이 삶을 조금 덜 외롭게 만들고, 그 마음이 다음 사람을 향해 손을 뻗게 만든다는 것을.
정세랑은 조금 독특한 소재의 이야기를 쓴다. 곶감을 먹으면 죽는 뱀파이어, 귀로 과자가 자라는 청년, 총구를 손바닥으로 막는 사람, 그리고 2만 광년을 건너온 외계인 애인까지. 하지만 그녀의 소설은 한 번도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을 더 예리하게 응시하기 위해 ‘이상한 이야기’가 필요했던 건 아닐까.
『지구에서 한아뿐』은 정세랑식 기이함의 정수라고 본다. 외계인 경민과 지구인 한아의 사랑 이야기라고 요약할 수 있지만, 이 책은 단순한 로맨스도 우주적 SF도 아니다. 저탄소생활을 실천하는 의류 리폼 디자이너나 소외된 사람들의 사소한 슬픔에 눈물 흘리는 외계인까지, 기이하지만 어찌 보면 함께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이들의 이야기다. 배경은 우주지만, 결국 도달하는 건 윤리다. 무한한 우주보다 작은 온기가 더 중요하다는 것. 존재의 다름보다 함께 있음의 가능성을 더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
한아는 말한다.
우주가 아무리 넓어도, 직접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야기들이 있으니까.
이 문장은 정세랑이 소설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할 것이다. 이야기를 통해 직접 이야기하지 않으면 전해지지 않는 감정과 윤리들. 그것이 바로 그녀의 이상하고도 사랑스러운 상상력의 윤곽이지 않을까.
『보건교사 안은영』에서는 그 상상력이 더 일상적인 형태로 다가온다. 보건교사이자 퇴마사인 안은영은 말하자면 ‘악귀를 퇴치하는 슈퍼히어로’지만 그녀의 무기는 비비탄 총과 플라스틱 칼.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녀가 학생들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피해자의 말을 전적으로 믿고, 어떤 이상한 기운 앞에서도 도망가지 않으며, 사람을 해치는 괴물과 그것을 조용히 외면하는 기성질서에 맞선다. 이쯤 되면 정세랑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윤리적 모티프들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기이한 존재를 배척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태도
무해함을 넘어서는 다정한 감수성
그리고 무엇보다, 연약함이 강함으로 발화되는 순간들
정세랑의 세계에서는 손에 총을 쥔 사람이 아니라, 총을 맨몸으로 막는 사람이 세상을 바꾼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늘 기묘한 존재, 다른 존재로 살아간다. 이들은 주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한 이들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먼저 윤리의 가능성을 감각하게 된다.
'이상하다'는 말이 정세랑에게는 찬사가 되지 않을까. 그 기이함은 도피가 아니라 전복이고 상상력은 탈출이 아니라 현실을 더 윤리적으로 바라보기 위한 렌즈다. 그녀의 상상력 속에서는 뱀파이어도 인간을 배려하고, 외계인도 지구 환경을 걱정하며, 귀가 쿠키로 변한 사람조차 누군가를 사랑한다. 그들은 모두 상처 입었지만 결코 타인의 상처를 무시하지 않는다. 정세랑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상해. 하지만 네가 다치지 않길 바라.
이 문장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가장 듣고 싶은 다정함의 윤리 아닐까.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는 정세랑이라는 사람과 직접 대화한 기분이 드는 책이었다. 소설이 허구의 감정 속에서 독자에게 말을 건넨다면 이 책은 아주 솔직하고 조용하게, 그러나 멀리서 반짝이는 신호처럼 말을 걸어왔다.
아무것도 아닌 나를 선택해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분들이 의기양양하실 수 있게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었다.
작가가 독자를 사랑한다는 표현은 흔하지만 그 사랑이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다는 책임의 고백은 좀처럼 듣기 어렵다. 누군가 자신을 믿어주었기에, 그 믿음을 지키고 싶다는 태도. 살아남는다는 말이 단지 생존이 아니라 누군가의 사랑에 값을 매기지 않고 버텨내는 마음의 방식이라는 걸 작가는 말하고 싶었나 보다.
우리는 이제 안다.
정세랑의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조금 다르다.
그들은 흔히 말하는 중심이 아닌 곳에 서 있고, 조금 이상하고, 조금 연약하지만 무해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세상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
그 문장들은 어떤 밤에는 내게 무사히 하루를 건너게 해주는 다리였고, 어떤 날에는 다시 사람을 믿어도 되겠다는 작고 단단한 확신이었다. 다정함은 미덕이 아니라 실천이라고 믿게 되었다. 작가의 문장을 통해서가 아니라 작가가 꾸준히 살아내는 방식 그 자체로 전해지는 윤리의 감각.
정세랑은 대단한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아니다.
대신 그 누구보다 사람의 감정을 믿고, 그 믿음을 살아가는 방식으로 바꿀 줄 아는 사람이다.
이상하고도 사랑스러운 세계는 여기에 있다.
누군가는 그 다정함을 믿었고, 누군가는 그 다정함으로 살아냈다.
그리고 나 역시 그 다정함에 감응하는 사람 중 하나로 남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