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조각들로 말하려는 건
책을 읽는다는 건 종종 내 안의 공간에 가구를 배치하거나, 벽에 그림을 거는 것처럼 인테리어를 바꾸는 과정과 비슷한 듯싶습니다. 그 공간은 매번 조금씩 달라지겠지만 문득 새로운 작가를 만났을 때 그 방 안의 풍경이 완전히 뒤바뀌기도 하니까요. 제게 줄리언 반스를 처음 만났던 순간이 그러합니다. 무심코 친구가 추천해 준 책을 들었고, 영국 소설 특유의 건조한 유머와 세련된 문체가 첫 장을 넘기자마자 곧바로 빠져들게 했거든요.
그의 글을 읽는 것은 단순히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만은 아닙니다. 줄리언 반스의 문장들 속에는 일상의 평범하고 사소한 순간이 가진 복잡함과,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누군가에겐 사소해 보이는 선택이나 지나쳐 버린 관계 같은 소재들이, 결국 인생 전체의 궤적을 바꿔 놓는다는 사실을 절제된 톤으로,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게 전달합니다.
어느 퇴근길,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지하철에서 읽었습니다.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책 속 인물의 사소한 후회와 진실에 대한 고백이 마치 내 이야기처럼 느껴졌달까요. 내 삶에서도 기억과 진실, 그리고 선택의 순간이 어우러져 복잡한 실타래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는 순간이었죠. 작가의 문장이 나를 흔들고, 내면의 감정들을 일깨우는 경험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그날 이후 줄리언 반스는 제게 흔적을 남긴 작가가 되었습니다.
기억과 진실 사이에서 -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는 세 번이나 맨부커상 후보에 올랐다가 수상하지 못한 무관의 제왕이었습니다. 그가 네 번째 도전 끝에 수상의 영예를 안은 2011년은, 영국 문단은 전례 없는 파열음을 겪고 있었습니다. ‘문학의 가독성’이라는 심사기준을 둘러싸고 날 선 논쟁이 오갔고, 그 와중에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가 등장했거든요. 만장일치로 수상작으로 결정된 이 짧은 소설은(한글책은 300페이지 가까운데, 영문본으로는 150 페이지 정도 된다고 하더라고요.) 거대 담론 없이도 진실을 향한 탐색이 얼마나 깊을 수 있는지를 증명했습니다. 심사위원장이었던 스텔라 리밍턴은 '이 작품은 영문학의 고전이 될 것이다.'라고 선언할 정도였으니까요.
이 소설은 기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기억이 어떻게 조작되고 착각되는가에 대한 심리 스릴러에 가깝겠네요. 주인공 토니 웹스터는 자신이 살아온 삶을 평이하게 회상하며 이야기를 시작하는데요. 하지만 서서히 드러나는 과거의 편린과 유언, 편지, 일기장 등의 조각들은 그가 기억하고 있는 것과 실제로 있었던 일 사이에 얼마나 큰 괴리가 있었는지를 드러냅니다. ‘기억은 자존감에 의해 기록된다’는 이 작품의 핵심 문장은, 독자가 믿어온 서사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습니다.
에이드리언이라는 지적이고 심오한 친구, 그리고 연인 베로니카와의 관계. 그 속에 묻혀 있던 또 하나의 편지는 이야기의 후반부에서 폭발하듯 등장하며 토니의 삶 전체를 뒤흔들게 됩니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놓친 것, 혹은 의도적으로 외면했던 진실의 무게를 깨닫게 되죠. 그러나 이 깨달음조차 진짜 진실이라 확신할 수 없습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그 어떤 결론도 내리지 않는데요. 반스는 진실보다 중요한 것이 그 진실에 다가가려는 태도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마치 양파껍질을 벗기듯 인물의 내면과 기억의 구조를 하나하나 드러냅니다. 회한과 윤리, 기억과 책임이라는 무거운 주제들이 정교한 문장으로 짜여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기억의 윤리에 대한 철학적 성찰로 읽히기도 합니다. 어떤 비극은 우연이라는 말로 덮을 수 없을 겁니다. 그것은 우리가 기억하기를 포기한 책임의 결과일 수 있다는 것일지도 모르니까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원제는 The Sense of an Ending입니다. 직역하자면 '결말의 감각' 쯤 될 텐데요. 주인공은 마지막까지 예감했으나 감히 받아들이지 못했던 결말 앞에 서게 됩니다. 이쯤에서 줄리언 반스는 우리에게 묻죠.
당신이 믿어온 그 이야기는 정말 맞는가?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지금 누구의 삶을 살고 있는가?
상실 이후에도 사랑은 계속된다 -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2008년, 줄리언 반스는 아내 팻 캐바나를 멀리 떠나보냈습니다. 영국 문단에서 전설적인 문학 에이전트로 불리던 그녀는 반스 삶의 중심이자 문학적 동반자였죠. 그녀의 죽음 이후 반스는 모든 인터뷰를 거절한 채 침묵했고, 문학 활동만으로 슬픔을 간접적으로 흘려보냅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어느 날, 그는 드디어 침묵을 깨고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를 세상에 내놓습니다. 이 책은 사랑의 구조를 고통과 비탄으로 되짚는, 조용하고도 위대한 장례식 같은 기록입니다.
책은 세 개의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기구를 타고 하늘을 올랐던 사람들의 이야기, 평지 위에서 이뤄졌던 사랑의 이야기, 그리고 지하로 내려가는 오르페우스의 독백. 각각은 실존 인물을 다룬 역사적 르포, 허구적 사랑 이야기, 자전적 에세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반스는 이것을 원 제목처럼 인생의 층위(Levels of Life)라 부르며, 우리가 살아가며 겪는 모든 사랑과 이별, 영광과 추락이 한 사람 안에서 다층적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문학의 구조 자체로 내보입니다.
세 번째 장 ‘깊이의 상실’에서 그는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줄리언 반스의 언어는 절제되어 있지만, 고통의 농도는 더욱 짙죠.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는 말은 단순한 감정의 지속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부재의 시간을 견디는 방식이며, 죽은 아내를 자신의 삶 속에 내면화하는 고통스러운 기술이라 읽히거든요. 그는 죽은 아내에게 말을 걸고, 꿈에서 만나고, 그리움이라는 새로운 패턴으로 살아갑니다. 그것은 다시는 상승하지 못할 비행의 반복이자 기억이라는 이름의 깊은 우물 속을 맴도는 일이었고요.
줄리언 반스는 종교도 신념도 붙잡지 않습니다. 대신 문장과 기억, 부재와 환영으로 고통을 살아냅니다. 종이에 지은 타지마할이라는 비유처럼, 이 책은 아내에게 사랑과 상실에 바치는 문학적 기념비라 볼 수 있습니다. 애도의 정점에서조차 그는 자기 연민을 경계하고, 감상을 거두며, 사랑을 고요한 문장으로 정제하거든요. 그래서 이 책은 견디기 어려울 만큼 슬프지만 동시에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이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 이후에도 사랑이 지속된다는 믿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줄리언 반스는 그 사실을 견디는 모습으로 말하는 것 같아요. 이 고요한 책 속에서 끝나지 않는 사랑의 형태를 보게 됩니다. 죽음이 모든 것을 끝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랑은 정말로 그렇게 끝나지 않는 것이라고 말이죠.
진실을 쫒는 여정 – 『플로베르의 앵무새』
책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겁니다. 재밌어서 흥미진진해서 서글퍼서 여백이 남아서 잔잔한 감동이 있어서 반전의 매력이 있어서 등등. 그런데 『플로베르의 앵무새』는 귀경길 고속도로나 퇴근길 강남 같았습니다. 잘 읽히지 않아 가다 서다를 반복했거든요. 그래서 잘 잊히지 않는 것 같아요.
한 남자가 박제된 앵무새를 찾아 떠납니다. 그의 이름은 제프리 브레이스웨이트. 퇴역 의사이자 플로베르의 애독자인 그는, 플로베르가 『순박한 마음』을 집필할 때 영감을 받았다는 박제된 앵무를 찾아 플로베르의 흔적을 쫓아갑니다. (플로베르의 작품에서 앵무새는 상징적인 존재로, 진실과 자유를 의미합니다.) 플로베르가 루앙의 박물관에서 빌려왔다던 앵무새. 두 박물관에서는 각기 다른 앵무새를 진짜라 주장하고, 제3의 박물관에 또 하나의 후보가 등장하는데요. 이야기는 결국 하나의 진실에 도달하지 않고, 결국 앵무새는 그저 상징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줄리언 반스가 우리에게 묻는 것 같았어요. 진실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문학 안에서 과연 단일한 형태로 존재할 수 있는가.
줄리언 반스는 이 소설인 듯 에세이인듯한 작품에서, 진정한 가치는 허구, 비평, 전기, 철학, 사랑, 사회 등 다양한 주제들이 하나의 문학적 콜라주처럼 어우러지는 방식에 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플로베르의 연보를 병치하고 그의 연애편지를 풍자하며, 이런저런 동물에 대한 열전을 구성하고 아이러니라는 키워드로 문학을 분석합니다. 어떤 장면에서는 철도와 프랑스혁명의 영향을 고찰하며, 플로베르를 둘러싼 평가의 피상성을 조목조목 비판합니다. 이는 단순한 작가 탐구가 아니라, 문학이라는 행위 자체에 대한 깊은 질문이자 반론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죠.
브레이스웨이트는 단지 플로베르를 좋아하는 독자였을 뿐만 아니라, 삶에서 방향을 잃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내의 죽음을 겪은 후 플로베르라는 인물을 통해 자신의 상실을 환기하고 복원하고 이해하려 합니다. 그렇기에 『플로베르의 앵무새』는 플로베르에 대한 책인 동시에 애도의 책, 그리고 읽는 자의 정체성을 되묻는 책이기도 합니다. 앵무새는 앵무새 자체가 아니라 진실의 메타포이겠죠.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믿고 싶은가’에 따라 달라지게 될 겁니다.
줄리언 반스의 문장은 유머와 지성을 띠면서도 그 너머에 도달하게 만드는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플로베르를 통해 작가란 어떤 존재인지, 예술은 어떤 윤리를 갖춰야 하는지, 그리고 역사는 어떻게 편향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플로베르의 앵무새』는 그 어떤 확언도 하지 않고 질문을 남기죠. 진짜 앵무새는 무엇인가? 진실은 존재하는가, 아니면 반복되는 해석의 수열 속에 사라지는가?
이 소설은 독자에게 깊은 인식의 의무를 지우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읽는 이는 자신이 믿어온 문학의 형식을, 진실의 정의를, 심지어는 자신의 읽기 방식마저 되돌아보게 말이죠. 줄리언 반스는 말없이 웃으며 우리를 이렇게 안내하는 것 같아요. 앵무새는 어디에나 있고, 어쩌면 어디에도 없다고 말이죠.
진실은 아마도 우리가 묻는 방식만큼의 모습으로 존재할 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줄리언 반스를 만나고 나서 삶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기억이란 지나간 일의 보관창고쯤으로 여긴 것 같아요. 정리하면 깔끔해지고, 되짚으면 의미가 생길 거라 믿었죠. 하지만 지금은, 기억은 늘 어딘가 빠져 있고 기울어져 있으며 그 모양 그대로 삶을 구성하는 재료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조각난 기억으로 삶을 이야기하고, 그 불완전함 속에서 오히려 더 가까이 진실에 다가갈지도 모르죠.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 기억의 왜곡과 후회의 뿌리를 보았고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에서는 그리움이라는 감정의 깊이를 처음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플로베르의 앵무새』에서는 덧없는 진실을 좇는 일조차, 결국은 자기 자신을 마주하는 과정임을 깨닫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 작품은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만, 결국은 같은 질문을 던지는 건 아닐까요.
'당신은 무엇을 믿고, 어떻게 기억하며, 그 조각들로 무엇을 말할 수 있느냐'라고 말이죠.
이제는 어떤 이야기를 만났을 때 그것이 사실인가 보다 어떤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과거를 서둘러 의미 있게 만들기보다 그 안에 남은 공기와 침묵까지 함께 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요. 줄리언 반스의 문장을 따라가며 깨닫게 된 것은 삶은 언제나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으며, 때로 말보다 여백이 더 많은 진실을 담고 있다는 점일 겁니다.
그래서 오늘도 삶의 조각을 주으려 합니다.
분명했던 것들이 흐려지고, 놓쳐버린 장면들이 느닷없이 떠오르는 과정을 서두르지 않으려고요. 다만 그 조각들을 정성껏 바라보고, 나만의 서사가 될 수 있도록 천천히 되짚어보려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줄리언 반스가 작품을 통해 제게 안내해 주는 삶의 방식이라 믿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조각들을 통해 조금씩 나 자신을 말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