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가혹하고 우리는 상처받았지만
앨리시어의 어머니가 짐승을 다스린다. 씨발 상태가 되어 씨발년이 된 그녀는 그녀가 가진 짐승의 머리뼈부터 꼬리뼈까지를 다룬다. 짐승을 향해 팔을 휘두를 때 그녀는 관절을 어깨 뒤쪽까지 젖혀 완전한 힘을 싣는다. - 『야만적인 앨리스씨』
그렇게 할 때 그녀는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 거라니까. 그런 순간에 그녀는 한 점 빗방울처럼 투명하고 단순하다. 때리고 싶어서 때리는 거야. 때리니까 때리고 싶고 때리고 싶으니까 가속적으로 때린다. 참지 못한다기보다는 참기가 단지 싫은 것이다. 때려서는 안 된다는 당위를 내면에 쌓는 일이 귀찮고 구차해 이것도 저것도 마다하고 때리는 데 몰두하는 것이다. - 『야만적인 앨리스씨』
황정은 작가. 읽어 내려간 첫 작품이 강렬했기에 정확히 기억한다. 당황스러웠고 불쾌했으나 이상하게도 냉정했지. 가혹하구나. 가차 없구나. 하지만 그 뒤에 놓인 건 생존의 언어구나. 파열음의 껍데기를 쓴 고백이었구나.
작가의 문장은 아주 쉽게 읽는 사람의 예상을 부순달까.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숨겨왔던 어떤 마음을 찢고 들어온다. 때론 띄어쓰기 없이 문장이 끝나지 않고 반복되며, 어떤 문장은 너무 과해서 낯설다. 그런데 읽을수록 그 낯선 문장들이 내 마음을 너무 잘 알고 있다는 듯 파고든다. 분노를 억누른 채 웃어야 했던 날들, 도망치고 싶지만 버텨야 했던 순간들, 그저 견디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때. 황정은의 문장은 그런 순간들을 대신 앓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상처받은 사람들이지 않을까. 다만 그 상처를 누구에게도 꺼내보이지 않았을 뿐이겠지. 황정은 작가의 문장은 그 상처에 이름을 붙이고, 형태를 주고, 방향을 건넨다. 말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마음과 말로는 도달하지 못할 자리 사이를 작가는 문장으로 쓴다. 어긋난 문장들, 파열된 이야기들, 부드럽지 않은 문장들이 만든 낯선 울림 속에서 진짜의 감정이 솟아오른다. 부끄럽고 아프지만 따뜻하다.
하지만 끝내 외면하지 않는 문장. 살아낸 사람들만이 쓸 수 있는 감각. 황정은의 문장은 다정하지 않다. 하지만 그건 사랑의 다른 말일지도 모른다.
작가의 얼굴 - 기이한 울림
황정은이라는 이름은 단단하고 어두운 울림이다. 한국문학이 포착하지 못했던 목소리들을 새로운 언어로 써낸다. 시류나 유행을 따르지 않지. 중심에서 벗어나고 안온함을 경계하며, 이야기의 가장자리에 있는 존재들에 집중한다. 무너져가는 사람, 이미 무너진 사람, 이름이 아닌 감정으로만 둥둥 떠다닐 사람들. 작가는 그런 인물들을 통해 우리가 보지 못한 세계를 보여준다.
황정은 작가의 글쓰기는 기이할 정도로 정직하다. 위로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검열하지 않고, 독자를 붙잡기 위해 서사를 과장하지 않는다. 지극히 사실적인 언어로, 감각적이면서 미세한 균열이 생긴 문장을 만들어낸다. 그 균열이 덧대고 늘어져 붙이기 힘든 지경에 놓였을지라도. 누구에게는 거칠고 불편할 수 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너무도 간절한 언어의 입구가 된다.
문학평론가들은 황정은 작가를 '사회적 감수성의 작가', '기억과 윤리의 작가', '언어를 실험하는 서사 기술자'로 부르곤 한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누군가의 슬픔을 감각할 수 있는 사람, 그 감각을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쓸 수 있는 사람이라고.
작가란 자기 안에 믿고자 하는 진실을 문장으로 꺼내놓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그 방식이 유려할 필요는 없겠지. 거칠고 뒤틀린 언어일수록 그 감정은 더 깊게 뿌리내릴 수 있을 테니까. 황정은 작가는 그런 방식으로 소통한다. 삶이 쉽게 문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래서 문장을 쉽게 다루지 않는다. 그래서 늘 진실에 닿아 있다. 읽는 사람의 고통스러운 진실에, 살아 있는 진실에, 사라지지 않은 진실에.
황정은 작가는 그렇게 말해지지 않은 것들을 문장으로 만들며 존재한다. 외면하지 않고 조롱하지 않으면서도 단단하게 존재하는 문장들. 그러니 잊을 수가 없지.
문장들이 만든 자리 – 작가가 그리는 세계
작가의 소설은 어느 하나도 쉽거나 안온하지 않다. 그녀의 이야기에는 끝없이 낙하하고, 사라지고, 존재가 흐려지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파씨의 입문』의 세계는 가혹한 세계를 간신히 살아내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연통의 따뜻함 속으로 들어가 눌어붙고 싶지만 끝내 손과 발은 차가운 파씨처럼, 평안한 삶은 늘 닿을 듯 닿지 않는 거리 너머에 있다. 『낙하하다』의 화자처럼 어디에도 충돌하지 못한 채 삼 년째 떨어지고만 있는 삶이란, 그저 비유가 아니라 현실의 감각이다.
그 감각은 『야만적인 앨리스씨』에서 극에 이른다. ‘씨발됨’이라 불리는 상태. 맥락 없이 가속되는 고통. 짐승처럼 휘두르는 손. 앨리시어는 존재이기 이전에 상태이고, 비는 앨리시어가 세상과 단절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장치다. 고통을 감각하지 못하는 세계 속에서 그녀는 차라리 짐승이 되고, 짐승이 된다는 건 결국 살아남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무도 아닌』에서는 사회적 비극과 일상의 파열이 겹쳐진다. 감정노동, 계급적 불평등, 혐오의 언어와 구조적 폭력. ‘계급이라는 건 이웃의 취향으로부터 차단될 방법이 있다는 것’이라는 문장은 지금 우리의 일상을 냉정하게 응시한다. 작가는 정제된 문장으로 사회 구조를 조각한다. 그 조각은 칼날처럼 날카롭지만 동시에 칼날을 쥔 손바닥만큼이나 뜨겁다.
『디디의 우산』과 『연년세세』는 황정은 작가 소설의 윤리적 감수성이 보다 확장된 지점을 보여준다. 세월호 이후 세계는 ‘망한 것이 아니라 계속된다’는 고통스러운 인식 아래, 인물들은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끝내 말하려 애쓴다. ‘너희가 무슨 관계냐’는 질문을 받는 두 여성의 시선 속에, 사랑과 공포, 연대와 침묵이 겹쳐진다. 『연년세세』에서 순자로 분한 이순일과 두 딸로 그리는 여성의 계보는 ‘말해지지 않았던 시간’을 통과해 온 여성들의 목소리를 오늘에 위치시킨다. 이 모든 작품을 관통하는 건 ‘누구도 몰랐던 자리에 말을 남기는 사람’으로서의 황정은이다.
그리고 『백의 그림자』. 처음 만난 사람이자 동시에 가장 오래 함께했던 사람처럼, 황정은의 문체가 만들어내는 ‘느낌’의 시작이다. 그림자처럼 사라지는 사람들, 빽빽한 도시와 부서지는 관계, 그러나 끝내 서로를 부르는 목소리. 존재는 흔들리지만 감각은 남는다. 무재와 은교가 나누는 말속에는, 이 세계에서 버틸 수 있는 어떤 방법이 들어 있다. 사랑이라는 이름이 아니더라도.
황정은 작가의 작품은 끝내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끝까지 포기하지도 않는다. 존재와 고통, 살아 있다는 것의 정직한 무게를 견디는 언어. 작가는 그 언어로 불안한 이 세계를 기록한다. 읽는 사람은 멈춰 서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으며, 작가는 생의 감각을 세워 도달할 수 없는 자리를 향해 나아간다.
사라지지 않는 존재들
세상은 생각보다 가혹하다. 부서지지 않으려 애썼지만 이미 바스러진 마음을 추스르느라 하루하루를 버티는 날들. 어떤 고통은 말이 되지 않았고 어떤 기억은 오래되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스스로에게 말하고 또 말하는 방식으로 살아왔다. 괜찮다, 괜찮을 것이다, 아니, 그냥 어떻게든 오늘 하루를 살아내 보자고.
많은 것을 잃었다 생각했고 잃어버린 사랑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여겨 포기했다. 그러나 견뎌낸 존재는 그 자리에 끝내 남아있다. 아무도 몰랐던 눈빛으로, 혼자만 아는 슬픔으로, 말없이 서 있는 방식으로 그렇게 남아 있다.
우리가 서로를 다 알 수는 없지만, 아주 미세한 감각들로 연결될 수 있다. 가령 같은 문장을 읽으며 천천히 눈을 감는 일, 다른 슬픔을 비슷한 기억으로 받아들이는 일,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어떤 마음의 떨림 같은 것들. 그 작은 연결이 때로는 구원이 된다.
그러니 이제는 황정은 작가가 어느 수상 소감에서 밝힌 것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가혹하고 우리는 상처받았지만, 우리는 사라지지 않았고 아직 연결될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