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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작가들(12) - 김금희

있지 않음의 위로

by 세잇

사랑의 관찰자

'조금 부스러질 뿐 버릴 수 없는 게 마음이에요.' 김금희라는 작가의 모든 것이 이 한 문장에 담겨있지 않을까 싶다. 마음이 상처받고 부서져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그 부서진 마음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 김금희는 이렇게 마음의 미세한 떨림들을 언어로 번역해 내는 사람이다.


200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후 김금희 작가는 줄곧 우리가 미처 이름 붙이지 못했던 감정들의 영역을 탐구해 왔다. '아주 없음'이 아니라 '있지 않음'의 상태라는 표현이 작품 세계를 가장 정확하게 요약한다. 완전한 부재도 확실한 존재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서 맴도는 마음들. 작가는 바로 그 애매모호한 경계를 걷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왔다.


그런 김금희를 나는 '감수성으로 길어 올린 사랑의 관찰자'라고 부르고 싶다. 그는 (사랑을 해보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을 관찰하는 사람이다. 물론 관찰한다고 해서 냉정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깊은 애정을 가지고 관찰하지. 덕분에 사랑의 모든 순간을, 사랑의 모든 양상을 놓치지 않으려 애쓴다. 작품 속 인물들이 사랑에 빠질 때 그들은 격정에 휩쓸리지 않는다. 대신 자신이 사랑에 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관찰한다. 사랑이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변하고, 어떻게 끝나는지를 지켜본다. 그 과정에서 사랑의 본질을 발견한다.



상처와 연대, 그리고 치유의 이야기들

『경애의 마음』은 1999년 인천 인현동 상가건물에서 난 화재로 56명이 사망하고 78명이 부상당한 실제 사건을 작품 속에 끌어들임으로써, 개인의 트라우마가 어떻게 삶 전체를 지배하는지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반도미싱 영업팀의 상수와 경애. 두 사람은 상실의 체험을 공유한다. 상수의 단짝 친구로 단편영화를 같이 찍었던 은총과 경애가 영화 동아리에서 만나 풋풋한 사랑을 나눴던 E가 실은 동일 인물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그리고 그 친구를 앗아간 것이 바로 인천 호프집 화재였다.


김금희는 이 작품에서 마음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준다. '마음을 폐기하지 마세요. 마음은 그렇게 어느 부분을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우리는 조금 부스러지기는 했지만 파괴되지 않았습니다.'라는 문장은 상처받은 마음을 대하는 김금희만의 관점을 보여준다. '그냥 있죠. 어떤 시간은 가는 게 아니라 녹는 것이라서 폐기가 안 되는 것이니까요. 마음은.' 경애의 이 말은 사랑과 상실이 단순히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까지 이어지는 감정임을 보여준다. 김금희는 치유가 상처의 완전한 소거가 아니라, 상처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임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너무 한낮의 연애』는 사랑의 변덕스러움에 대한 이야기다. 대학시절 펑퍼짐한 건빵바지, 국방색 야상을 입고 다니던 양희가 어느 날 맥도널드에서 심상한 목소리로 '나 선배 사랑하는데'라며 필용에게 고백한다. 하지만 양희의 사랑 고백은 미래에 대한 설계가 철저하게 공란으로 비어있는 그날그날의 충실한 감정 고백에 가까웠다. 오늘은 사랑하지만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식의,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는 식의. 십수 년이 지나 필용과 양희가 재회했을 때, 필용은 이미 대기업 영업팀장에서 시설팀으로 좌천당한 상태였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이 경우 어쩌면 경제 위기의 산물'이다. 김금희는 개인의 사랑 이야기가 결코 자폐적이지 않으며, 불안한 경제전망과 직업 불안정성이라는 시대적 배경과 맞물려 있음을 보여준다.


『복자에게』는 장편소설로, 제주의 실제 산재사건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경애의 마음』에서 모든 이들의 마음의 안부를 물었던 작가가 『복자에게』에서는 한 사람의 구체적인 상황에 집중한다. 이 작품에서 김금희는 현실의 무게와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불안을 다룬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실패의 공기 가득한 현실… 소설까지 그럴 순 없잖아요'라고 말했듯이,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소설이 줄 수 있는 위안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김금희는 이 작품을 통해 개인이 사회적 비극과 마주했을 때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 과정에서 느끼게 되는 복잡한 감정들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복자'는 복을 가져다주는 존재라는 의미이지만, 현실에서는 그 복이 쉽게 주어지지 않는 아이러니를 품고 있다.



감정의 고유성과 언어의 한계

『오직 한 사람의 차지』는 무미건조하던 일상을 채우는 풍부한 감정의 서라운드라는 부제가 이 책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비록 잃는 것에 익숙해져 가는 삶이지만, 이 충만한 감정만큼은 오롯이 우리의 차지'라는 문구가 이 소설집의 핵심을 담고 있다. 작가는 평온했던 내면을 뒤흔드는 과거의 순간들에 주목하며, 우리가 삶을 살아내기 위해 묻어두어야만 했던 지난 시절의 상처를 들여다본다.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붙드는 일, 삶에서 우리가 마음이 상해가며 할 일은 오직 그뿐'이라는 작가의 말은 이 작품집이 추구하는 바를 명확히 한다. 각자의 감정과 경험은 그 사람만의 고유한 것이며, 그 고유성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의미라는 것이다. '오직 한 사람의 차지'라는 제목은 배타성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유일성에 대한 이야기다. 아무리 비슷한 경험을 했어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소화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리고 바로 그 고유성이 인간의 존재 이유다.


『사랑 밖의 모든 말들』은 김금희가 데뷔 11년 만에 펴낸 첫 산문집이다. 소설이 아닌 산문을 통해 작가는 더욱 직접적으로 자신의 내면과 일상을 드러낸다. '아픈 기억을 버리거나 덮지 않고 꼭 쥔 채 어른이 되고 마흔이 된 날들을 후회하지 않는다. 아프다고 손에서 놓았다면 나는 결국 지금보다 스스로를 더 미워하는 사람이 되었을 테니까'라는 문장에서 김금희의 상처에 대한 철학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그렇게 일렁이는 말들이 마음의 안팎으로 다 빠져나가기를 기다려야 하는 오후가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그제야 찾아드는 텅 빈 평안이야말로 대상을 지정할 필요도 없는, 삶에 대한 사랑이라고'라는 구절이다. 말과 침묵, 충만함과 공허함 사이에서 찾아내는 평안에 대한 김금희만의 통찰이 담겨있다. 삶과 사람과 문학에 대한 짝사랑의 연대기라고 불리는 이 산문집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직접 말하기보다는, 사랑 주변을 맴도는 모든 말들을 통해 사랑의 본질에 다가간다.



김금희만의 언어와 문체 - 있지 않음의 미학

'너무 한낮의'라는 표현 자체가 김금희의 언어적 감각을 보여준다. 문법적으로는 어색하지만, 바로 그 어색함이 작품의 정서를 정확히 담아낸다. 너무 밝아서 오히려 어둡고, 너무 선명해서 오히려 흐릿한 그런 시간. 과거의 연애를 돌아보는 화자의 복잡한 심정이 바로 그렇다. 김금희의 문장은 명확하지 않다. 의도적으로 모호하다. '이러하고', '이러이러해서', '어찌어찌' 같은 지시어들이 구체적인 내용을 가리키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그 모호함이 마음의 실제 모습에 더 가깝다. 우리의 감정은 명확하게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항상 '이러저러한' 상태로 존재한다.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서 영영 배회하는' 상태. 이것이 김금희 문학의 핵심이라고 본다. 그의 인물들은 확신을 갖지 못한다. 하지만 바로 그 불확실성이 그들을 더 인간답게 만든다. 확신을 가진 사람은 더 이상 성장할 필요가 없지만, 의심하는 사람은 계속 질문하고 변화한다. 김금희의 문체는 또한 반복의 미학을 보여준다. 같은 단어나 구조를 반복하면서 미묘한 변주를 가한다. 이는 마치 음악의 변주곡 같은 효과를 낸다. 같은 주제를 다른 각도에서 반복해서 바라보면서 주제의 깊이를 더해간다.


김금희 작가는 평범한 단어들을 조합해서 비범한 문장을 만들어낸다. 그의 어휘는 화려하지 않다. 일상에서 쓰는 평범한 단어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 단어들을 배치하는 방식이 독특하다. '너무 한낮의 연애', '있지 않음', '식물적 낙관' 같은 표현들은 모두 김금희만의 언어다. 문법적으로는 어색할 수 있지만 의미적으로 완벽하지 않을까. 이것이야말로 기존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었던 감정들을 새로운 언어로 포착해 내는 김금희 작가만의 능력이지 않을까.



일상의 철학자, 시대의 증언자

김금희 작가는 일상을 새롭게 발견해 낸다. 그에게 일상은 지루하거나 반복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공간이다. 같은 길을 걸어도 매일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고, 같은 사람을 만나도 매번 다른 면을 볼 수 있다. 그의 소설에서 극적인 사건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대신 미세한 변화들이 쌓여간다. 어제와 조금 다른 오늘, 오늘과 조금 다른 내일. 그 미세한 차이들이 모여서 삶의 궤적을 만든다.


작가에게 철학은 삶과 분리된 것이 아니다. 삶 자체가 철학이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사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소설을 읽으면 일상이 다르게 보인다. 평범한 것들이 특별해 보이고, 사소한 것들이 중요해 보인다.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적인 이미지로 번역하는 데 탁월한 작가는 '식물적 낙관'이라는 개념도 실제로는 화분을 기르는 일상적 경험에서 끌어온다. 매일 물을 주고, 햇빛을 쬐어주고,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는 것. 그것이 바로 낙관이다.


김금희 작가는 시대의 증언자이기도 하다. 그의 소설에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특징들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비정규직의 불안, 1인 가구의 외로움, 경쟁사회의 피로, 디지털 시대의 소통 방식 등이 자연스럽게 작품 속에 녹아들어 있다. 하지만 시대를 고발하거나 비판하지 않는다. 그저 관찰하고 기록한다.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세심하게 들여다본다. 인천 호프집 화재라는 실제 사건을 『경애의 마음』에 끌어들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개인의 트라우마가 사회적 사건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집단의 기억이 개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준다. 작가에게 시대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경험의 배경이다.



맺으며 - 있지 않음의 위로

김금희를 읽는다는 것은 불완전함과 화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모든 것이 명확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완벽하지 않아도 충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의 작품이 주는 위로는 '있지 않음의 위로'다. 확실한 답이 있지 않아도, 완전한 해결책이 있지 않아도, 그냥 그대로 살아가도 된다는 위로.


김금희의 문학은 조용하다. 크게 웃기지도, 크게 울리지도 않는다. 하지만 깊고도 깊지. 문장이 마음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며 오래 머문다. 책을 덮은 후에도 계속 생각하게 만들고 일상을 살면서 계속 떠오른다. 사랑이 변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보다는 변화 자체를 사랑의 본질로 받아들이는 것.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불완전함을 거부하지 않고, 애매함을 포용하는 것. 그것이 김금희가 우리에게 건네는 삶의 태도다.


그의 작품들을 읽으며 생각한다. 사랑의 정의에 대해, 관계의 의미에 대해, 상처와 치유에 대해, 일상과 특별함에 대해. 그리고 무엇보다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김금희는 이 모든 질문들에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함께 묻고 함께 고민하자고, 함께 걸어가자고 말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로가 된다. 김금희의 문학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이 동행의 감각이다. 혼자 걷는 길이 아니라 함께 걷는 길이라는 느낌. 그래서 조금 더 걸어갈 수 있게 되는 것.


있지 않음의 위로. 완전하지 않음의 아름다움. 불확실함의 가능성. 김금희는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한다. 그리고 말한다. 괜찮다고, 그대로도 충분하다고, 계속 살아가면 된다고. 그 목소리를 듣는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작지만 확실한 목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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