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혼자가 아니기에
어떤 작가의 문장을 처음 읽을 때, 그 문장이 마음속으로 스며들어 긴 여운을 남기는 순간이 있다. 나에겐 최은영 작가의 작품이 그러했다. 그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세상의 모퉁이에 서서 조용히 살아가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이었다. 화려하고 극적인 서사 대신, 투명하고 정직한 시선으로 인물들의 내면을 섬세하게 탐색하는 최은영의 글은, 마치 오래된 친구의 진솔한 고백처럼 다가와 마음을 어루만졌다. 나는 그의 문학이 전하는 희미한 빛 속에서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상처와 결핍을 마주할 용기를 얻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결되고자 하는 인간의 본질적인 염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최은영 작가는 우리에게 세상의 따뜻함과 동시에 날 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는, 그러면서도 그 안에서 살아갈 힘을 부여하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작가다.
그의 초기 작품인 『쇼코의 미소』는 인간관계의 복잡 미묘함과 상실, 그리고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들의 고독을 아름답게 그려냈다. 특히 표제작 「쇼코의 미소」에서 작가는 한국인 ‘소유’와 일본인 ‘쇼코’의 우정을 통해 시간과 문화의 간극 속에서도 변치 않는 인간적인 교류와 오해, 그리고 결국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보인다. 쇼코의 미소는 때로 따뜻하게, 때로는 차갑게, 혹은 그 모든 감정이 뒤섞인 채 우리에게 다가온다. 작품 속에서 쇼코는 소유에게 할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할아버지에게 나는 종교이고, 하나뿐인 세계야.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죽어버리고 싶어.”
이 문장은 타인의 과도한 사랑이 때로는 족쇄가 될 수 있음을, 그리고 우리가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가감 없이 내비친다. 최은영 작가는 사랑과 이해라는 보편적인 감정의 이면에 존재하는 그림자를 놓치지 않고 포착하며,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아파하는 인간의 민낯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러나 그 드러냄은 절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공감과 성찰로 이어진다.
소설집 『내게 무해한 사람』에서는 관계의 본질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 더욱 심화된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무해하다'는 말의 역설적인 의미를 탐구하며, 타인에게 상처 주지 않으려 애쓰는 태도가 때로는 자신이나 타인에게 또 다른 종류의 벽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 여름」은 성 소수자의 사랑과 우정을 그리면서, 세상의 편견 속에서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으려 애쓰는 인물들의 내면을 섬세하게 파고든다. 주인공 이경은 수이의 슬픔을 마주하며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수이는 시위하듯 우는 것이 아니었다. 이경을 공격하기 위해서, 이경에게 죄책감을 주기 위해서 감정을 과장하는 것이 아니었다. 수이는 단 한 번도 자기 상처를 과시한 적이 없었다."
이 문장에서 우리는 상처를 드러내는 방식조차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들의 고통을 엿볼 수 있다. 최은영 작가는 개개인의 고통을 섣불리 일반화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각자가 겪는 아픔의 고유성과 그 아픔을 감당하는 방식의 다양성을 인정한다. 이를 통해 나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깊은 경의와 함께 진정한 의미의 공감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밝은 밤』에 이르러 작가의 시선은 개인의 관계를 넘어선 역사와 세대, 특히 여성들의 삶과 그들이 겪어온 아픔으로 확장된다. 일제강점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친 여성들의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개인적인 상처가 어떻게 시대적 아픔과 겹쳐지고 또 어떻게 대물림되는지를 차분하게 그려낸다. 이 작품에서 여성들은 서로에게 위로와 지지가 되어주며 끈끈한 유대를 형성한다. 희령이라는 공간에서 할머니와 증조모의 삶을 더듬는 주인공 지연의 이야기는, 결국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지를 이해하는 과정이 된다. 작가는 작품 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 일, 이 세상에 머물다 사라진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기억되고 싶을까. 나 자신에게 물어보면 언제나 답은 기억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 고백은 기억의 무게와 망각의 편안함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누군가를 기억하는 행위 자체가 그 존재를 현재로 불러오는 가장 강력한 방식임을 이야기한다. 최은영 작가는 역사의 뒤편에 가려졌던 여성들의 삶을 조명하며, 그들의 고통과 희망을 '밝은 밤'이라는 뒤집힌 제목 아래 따뜻하게 감싸 안는다.
소설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는 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 즉 절망 속에서도 아주 작고 희미한 빛을 발견하려는 의지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다. 결핍과 상실, 견디기 힘든 고통 속에서도 삶을 이어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강렬한 희망 대신 잔잔한 위로를 건넨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자신의 시선을 명확히 보여준다.
“나의 결핍을 안고서 그것을 너무 미워하지도, 너무 가여워하지도 않고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슬프면 슬프다는 것을 알고 화가 나면 화가 난다는 것을 알고 사랑하면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서 나를 계속 지켜보는 일. 나는 지금 그런 일을 하는 중인 것 같다.”
이 문장은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그것을 미워하거나 과장하지 않으면서 묵묵히 삶을 살아가는 태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거대한 시련 앞에서 좌절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스스로를 지켜보며 작은 존재의 의미를 찾아 나간다. 작가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독자에게 삶의 부드러운 힘, 즉 희미하지만 꺼지지 않는 내면의 불꽃을 상기시킨다.
『애쓰지 않아도』는 짧은 소설들을 묶어낸 작품으로, 관계에서 오는 상처와 회복, 그리고 서투른 시절의 아픔을 다룬다. 표제작 「애쓰지 않아도」는 친구 관계에서 겪는 오해와 배신,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비로소 그 상처를 이해하고 치유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누군가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감정의 복잡함, 그리고 애쓰지 않아도 서로에게 마음을 쏟았던 순수한 시절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작품 속에서 관계의 상처를 응시하며 작가는 다음과 같은 통찰을 보여준다.
“사랑은 애써 증거를 찾아내야 하는 고통스러운 노동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심연 깊은 곳으로 내려가 네발로 기면서 어둠 속에서 두려워하는 일도,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만 어렵게 받을 수 있는 보상도 아니었다. 사랑은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것이었다.”
이 문장은 진정한 사랑과 관계는 억지로 증명하거나 애쓸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임을 일깨운다. 최은영 작가는 인물들이 겪는 내면의 소용돌이를 고요하고 침착하게 묘사함으로써, 독자들이 자신의 경험 속에서 비슷한 감정들을 되짚어 볼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그의 작품은 마치 거친 파도가 지나간 해변에 남은 자국처럼, 지워지지 않는 상처의 흔적을 조용히 바라보게 한다.
최은영 작가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작가의 시선은 언제나 약하고 소외된 존재, 혹은 내면에 깊은 상처를 지닌 이들을 향해 있었다. 작가는 세월호, 베트남 전쟁 등의 사회적 이슈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하되 그 거대한 비극 속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개인들의 삶과 감정을 놓치지 않는다. 그의 문체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더할 나위 없이 정직하고 섬세하여 인물의 심리를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미세하게 포착한다. 이러한 시선은 단순한 연민을 넘어선 깊은 이해와 공감으로 확장되며, 스스로의 삶과 타인의 존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힘을 지닌다.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종종 좌절하고 아파하지만 결국은 그 아픔을 안고 살아갈 방법을 찾아 나선다. 이는 작가가 가진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믿음과 희미한 희망 때문일 것이다.
최은영 작가의 문학은 우리에게 '당신은 혼자가 아니며, 당신의 상처와 결핍 또한 삶의 일부'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그의 작품들은 지친 영혼들에게 거창한 위로 대신, 아픔을 있는 그대로 마주할 용기를 선물한다. ‘쇼코의 미소’에서 시작된 관계에 대한 물음은 ‘내게 무해한 사람’에서 복잡성을 더하고, ‘밝은 밤’에서 역사적 깊이를 얻으며,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통해 고통 속에서도 빛을 찾아가는 인간의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준다. 그리고 ‘애쓰지 않아도’는 관계의 본질적인 아름다움과 상처의 흔적을 어루만진다.
작품을 통해 최은영 작가는 자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멸시와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편에서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겠다는 다짐을 꾸준히 지켜나가고 있다. 작가의 작품을 읽는 동안 우리는 그 희미한 빛이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그리고 그 빛이 모여 결국은 어두운 밤을 밝히는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믿게 된다.
그리하여 그의 이야기는
계속 우리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머물 것이며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이끄는
조용한 힘이 되어 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