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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작가들(1) - 레이먼드 카버

말하지 못한, 혹은 말할 수 없는

by 세잇

책, 좋아합니다. 소설, 더 좋아하고요. 그간 이런저런 소설들을 보아온 듯한데, 보다 보니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걸 구분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새로운 작가나 장르의 책을 찾기도 하고 좋았던 것을 더 파게 되는 과정들이 돌고 돌아 결국엔 취향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지지 않나 싶습니다.


(핑계일지 모르겠으나) 밥벌이의 고단함과 육아의 다이내믹함으로 인해 책을 볼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아요. 그래서 출퇴근 같은 이동 시간을 활용해 이런저런 사치(?)를 누리게 됩니다. 올해는 디지털 디톡스를 하겠다 마음을 먹고 여러 OTT 구독을 해지하고 나니, 사치의 시간이 온전하게 책에게만 쓰이는 것 같아 내심 기쁘기도 합니다 :) 자투리 시간에 볼 수 있는 건 역시 단편 소설이지요. 시간제약으로 인한 흐름이 끊기지 않기도 하거니와 하나의 스토리를 온전히 마음에 담을 수 있으니까요.


그간 읽은 책들을 소재로 이런저런 글을 쓰다 보니, 조금은 심심한 느낌이더라고요. 그래서 글 쓸거리를 고민하다가, 심한 독서편력을 갖고 있지만 애정하는 작가들 이야기를 풀어봐야지~하는 지경에 이렀습니다. 제게 취향이란 걸 만들어준 작가들과 좋아하는 작품에 사심을 담고 싶은 마음에 말이죠 :) 그래서 자주 보는 단편 소설 중에, 단편 소설하면 또 유명하신 분들이 많겠으나 '내가 사랑한 작가들'에 대한 시작은 '레이먼드 카버'로 하려고 합니다.


많진 않지만 그간 읽은 걸 알음알음 쌓아 두었더니 뭔가 예쁘게 되었습니다.



레이먼드 카버, 미국작가예요. 아쉽게도 알코올 중독으로 50이라는 나이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누군가는 미국의 체홉이라고도 하고요. 또 누군가는 미니멀리즘 소설의 정점에 있다고도 합니다. 어딘가 멋진 말들인 듯한데 저는 저렇게 멋지게 소개할 만한 문구가 없네요. 문장실력이 부족한 걸 보니 아무래도 책을 더 읽어야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먼드 카버를 소개한다면, '말하지 않고도 말을 하는 작가'라고 소개하고 싶습니다.


그의 문장은 짧고 간결합니다. 헤밍웨이를 닮고 싶었다고 하더라고요. 정제된 단어로 이루어진 문장들이 부담 없이 읽히는데요. 하지만 그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무나도 일상적인 말투와 장면 속에 우리가 쉽게 지나치는 마음, 관계, 감정의 균열을 딸기의 씨앗처럼 곳곳에 넣어놨어요. 대체로 침묵으로 점철된 이야기들인데, 다행히 그 침묵이 불안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게 참 이상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소설은 이미 끝났지만 여운과 여백으로 독자들을 계속 생각하게 만든다고 할까요.


그의 대표작 「대성당」을 처음 읽었을 때의 놀라움이 아직 기억에 남습니다. 주인공인 ‘나’가 맹인과 함께 눈을 감고 대성당을 그리는 장면에서, 설명도 해설도 없이 뭔가 큰 울림이 툭 하고 떨어지더라고요. 눈을 감고 그려본 대성당의 모습은 그저 건물의 윤곽이 아니라, 어쩌면 삶을 ‘다시 보고자’ 하는 몸짓처럼 느껴졌어요. 이 장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독자에게 어떤 결심과 질문을 동시에 건네줍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나요?” 같은 질문 말이에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소설은 「별것도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입니다. 여러 번 봤어요. 글이 짧아서이기도 하겠지만, 읽을 때마다 제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에 따라 소설의 마지막이 주는 여운이 항상 다르거든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돌아오는 월요일은 아들 스코티의 여덟 번째 생일입니다. 토요일에 스코티의 엄마는 초콜릿 케이크를 주문하며 빨간색 사탕으로 만든 행성 아래에 스코티 이름을 빵집 사장님께 적어달라고 해요. 그런데 월요일 아침, 스코티는 차 사고를 당하고 운전자는 현장을 떠나버립니다. 아이는 울지도 않고 아무 말없이 집으로 갑니다. 그리고 쓰러져요. 일어나지 못해 병원에 실려 갑니다. 병원에서는 가벼운 뇌진탕이라는데, 도무지 깨어나질 않습니다. 밤이 되었고, 다행히 잠든 것 같아 아빠는 잠시 집에 들러요. 집에 오니 전화벨이 울립니다. 받고 보니 전화 너머에서는 케이크 찾아가라고 아우성치고 끊네요. 어이가 없습니다. 병원에서 교대하고 엄마가 집에 갔는데 똑같은 전화를 받아요. 정신도 없는데 화가 나게 만드네요. 아이가 걱정되어 병원에 다시 가니 그 사이에 아이는 엄마 아빠의 곁을 떠나요.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 집에 다시 들렀다 케이크 가져가란 전화를 또 받고 빵집에서 생일 케이크를 주문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냅니다. 그래서 빵집에 가요. 빵집 사장님에게 자초지종을 말하며 분노를 토해냅니다. 빵집 사장님은 하던 일을 멈추고 미안하다고 말하며 두 사람을 의자에 앉힙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죠.


내가 갓 만든 따뜻한 롤빵을 좀 드시지요. 뭘 좀 드시고 기운을 차리는 게 좋겠소.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


생각해 보면 이상한 결말입니다. 그래서 케이크를 가져간 건지 롤빵을 먹은 건지, 마음을 푼 건지 화를 더 낸 건지 알 수 없습니다. 마무리되지 않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마음에 오래 남습니다. 삶은 대개 그렇게 끝나지 않고 계속되니까요. 무언가를 먹으며, 말없이, 각자의 방식으로 견디면서요.


저는 카버의 소설을 이런 여백과 침묵으로 기억합니다. 마치 어느 밤, 불 꺼진 거실에서 스탠드 하나만 켜놓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은 듯한 기분. 분명히 이야기는 끝났는데, 마음속에서는 아직 그 인물이 말을 이어가고 있는 듯한 그 잔상 말이에요.


우리는 모두 말하지 못한 것들을 하나쯤은 품고 살아가죠. 꼭 누군가에게 해야 했던 말이 아닐 수도 있어요. 나 자신에게조차 꺼내지 못한 질문들, 이미 지나가버린 순간에 붙들어두고 싶었던 감정들, 너무 늦어버려 더 이상 의미 없을 것 같은 사과들 말이죠.


레이먼드 카버는 그런 감정들을 일부러 말하지 않습니다. 말하지 않고도 전달되는 방식이 있다고 믿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독자인 우리는 그 믿음 속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의 이야기들을 ‘완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카버의 소설을 읽는 일이 단지 '읽기'가 아니라, 조용히 ‘마주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말하지 못한 나, 말할 수 없었던 그때의 나, 그리고 아직도 말해지지 않은 누군가의 마음과 말이죠.


말은 때때로 닿지 않지만, 여백은 닿을 수 있다고 믿어요. 그리고 여백이 닿는 곳에서야말로, 진짜 위로가 시작된다고요. 그런 의미에서 레이먼드 카버는 제게, 말하지 않음으로써 가장 따뜻한 이야기를 건넨 작가로 늘 기억할 겁니다.


이번 주말은 카버의 담담한 문장들에 한 번 도전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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