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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체 - 박지리

나만의 진짜 공을 찾아서

by 세잇

박지리, 경계를 허무는 이야기꾼

올해의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다가 '박지리문학상'이라는 게 있는 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박지리? 박경리도 아니고 박지리? 그래서 찾아봤죠. 궁금하니까. 박지리 작가는 스물다섯의 나이에 『합체』로 제8회 사계절문학상 대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등단했습니다. 문학 전공자도 아니고, 작가 수업을 따로 받아본 적도 없는 그야말로 '신인' 작가였다는 점이 놀라운데요. 주로 인간의 본질과 사회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었다고 하네요. 특히 『맨홀』, 『다윈 영의 악의 기원』, 『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 등 여러 작품에서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사회가 가진 모순이나 인간 내면의 심리를 날카롭게 꿰뚫는 탁월한 능력을 풀어냈다는데, 서른한 살에 요절합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출판사에서 박지리 작가의 이름을 내건 문학상을 만들게 되었다던군요. 그래서 작가의 작품을 찾아보지 않을 수 없었어요.



난쟁이 두 형제의 성장통

『합체』는 난쟁이인 아버지의 유전인자로 인해 키가 자라지 않는 일란성쌍둥이 형제 오합과 오체의 성장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키 컸으면' 하는 바람은 그야말로 지상 최대의 목표였죠. 형 합은 전교 우등생이지만 운동에는 영 소질이 없고, 동생 체는 공부는 꼴찌지만 농구만큼은 자신 있는 친구들인데요. 이처럼 성적부터 성격까지 닮은 구석이라곤 없는 두 형제에게는 '키'라는 공통의 고민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동생 체는 약수터에서 '계도사'라는 기묘한 인물을 만나 키 크는 비기를 전수받게 됩니다. 그리고 형 합과 함께 계룡산의 '형제동굴'로 33일간의 수련을 떠나게 되죠. 이 황당하고 엉뚱한 여정 속에서 두 형제는 자신들의 가장 큰 콤플렉스와 마주하고, 진정한 성장이란 무엇인지 깨달아 갑니다.


이 책은 단순히 키 크는 방법을 찾아 떠나는 모험담만은 아닙니다. 외모지상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루저라고 손가락질받는 이들의 고뇌를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죠. 또한, 사회적 편견과 고정관념에 맞서는 용기, 자신만의 가치를 찾아가는 과정, 그리고 가족 간의 사랑과 이해를 따뜻하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나만의 '진짜 공'을 찾아서

이 책에서 인상 깊었던 지점 중 하나는 '나만의 진짜 공'이라는 비유였습니다.

“합, 체, 니들은 아버지가 가지고 노는 이런 공 말고, 너희들의 공을 찾아야 해. 너희만의 진짜 공.”


작은 행사들을 돌며 연예인이 아닌 예능인으로 살아가는 쇼쟁이 난쟁이 아버지의 이 말은 두 형제에게, 그리고 이 책을 읽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아버지는 매일 수많은 공을 하늘로 쏘아 올리며 관객을 웃기는 일을 합니다. 하지만 그 공들은 아버지가 선택한 것이 아닌, 생계를 위해 주어진 '가짜 공'들이었죠. 아버지는 아들들만큼은 자신과 같은 삶을 살지 않고, 세상이 원하는 대로 휘둘리지 않으며, 스스로가 진정으로 원하는 '진짜 공'을 찾기를 바랐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공들을 만나게 됩니다. 남들이 다 가졌다고 하는 공, 성공이라고 불리는 공, 번듯해 보이는 공... 때로는 그 공을 따라 달리느라 정작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소설 속 합과 체가 '키'라는 공에 매달리듯이 말이죠. 하지만 작가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굴리고 있는 그 공이 정말 당신만의 '진짜 공'이 맞느냐고요.



평범함에 대한 갈망, 그리고 혁명

소설 속에서 체는 자신의 신체적 콤플렉스 때문에 괴로워하며 계도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어떻게 생각하든 다른 사람이 절 난쟁이,라고 부르면 저는 난쟁이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도사님, 전 만족을 바라는 게 아니에요. 그냥, 남들처럼 평범하기만 했어도, 이 두 다리가 눈에 띄지만 않아도 좋겠어요."


이 문장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함을 꿈꾸기보다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 남들의 시선에서 자유롭고 싶다는 솔직한 고백. 우리 사회는 평범함을 끊임없이 강요하면서도, 동시에 그 평범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을 낙인찍는 이중적인 잣대를 들이대곤 합니다. 체의 말은 이러한 사회적 편견과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담겨 있는 것이죠.


하지만 체는 단순히 좌절하지 않습니다. 혁명을 꿈꾸죠.

“체, 체, 체. 체의 가슴이 터질 듯 울렁댔다. 혁명이란 말이 가슴에 콱 박혀 들었다. 무슨 혁에 무슨 명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이 세상을 다 뒤집어엎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란 건 알아들었다. 다 뒤집어엎고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 그러면 키 작은놈은 커지고, 키 큰 놈은 작아지고, 못생긴 놈은 잘생겨지고, 잘생긴 놈은 못생겨질 수도 있다는 것인가, 그게 혁명인가”


체에게 혁명은 단지 세상을 뒤엎는 거창한 일이 아니라, 자신의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자신을 억압하는 사회의 기준을 뒤집는 일이었습니다. 자신과 이름이 같은 '체 게바라'를 형님으로 모시며 그가 세상을 뒤집는 혁명을 이룬 것처럼, 자신도 평범해지고 싶다는 그 간절한 바람이 곧 그만의 혁명이 되는 것이죠. 이는 우리가 각자의 삶에서 겪는 어려움과 좌절 앞에서 어떻게 맞서 싸우고, 어떻게 나만의 방식으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듯합니다.



진짜 생존 수단, 그리고 시간의 의미

계도사는 두 형제에게 또 다른 중요한 가르침을 줍니다.

“거창한 게 아냐. 사자한테 안 먹히려고 죽을 듯이 뛰는 가젤 본 적 있지? 사자 같은 이빨이 없으니까 대신에 그렇게 달리기라도 하잖아. 인간도 마찬가지야. 가젤의 다리처럼 각자 생존 수단 한 가지씩은 만들어야 한다고.” “안 만들면 어떻게 되는데?” “잡아먹히는 거지.” “누구한테? 사자?” “바보 같긴, 사자가 아니라 이 세상이다, 이 세상.”


이 대화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반드시 자신만의 생존 수단을 만들어야 한다는 현실적인 충고로 다가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존 수단은 단순히 직업이나 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겁니다. 그것은 나를 지켜내고, 세상의 파도 속에서 흔들리지 않을 나만의 강점, 나만의 가치, 나만의 지혜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잡아먹으려 할 때, 우리는 가젤이 뛰는 것처럼 나만의 방식으로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이죠.


그리고 소설의 말미, 계룡산에서의 33일이 심심할 것에 대비해 체가 가져간 라디오에서, 우연히 계룡산을 찾아와 수련했던 선배(?)의 사연이 소개됩니다. 매번 1등만 하던 이 수련 선배는 막상 수능 당일 첫 시간에 시험을 치르다 말고 뛰쳐나와 생을 마감하려하죠. 마침 시간을 돌려주겠다는 계도사를 만나고 나서 형제동굴에 가게 되는데요.


"할아버지가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했는데요, 뭐 그건 저에겐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렇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세상의 시간이 진짜 되돌아간 건 아니지만 그날, 죽지 않고 동굴로 들어가 다시 살 결심을 한 것으로 제 시간만큼은 돌려졌다고요."


과거의 후회나 미래의 불안에 사로잡히는 대신, 지금 이 순간의 선택과 결심이 우리의 시간을 되돌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메시지는 큰 위로가 됩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을 먹고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시간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합과 체가 전하는 잔잔한 깨달음

『합체』는 키라는 콤플렉스를 통해 청소년기의 고민을 풀어내지만, 그 이야기는 비단 청소년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키'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누군가는 외모일 수 있고, 누군가는 학력이거나 재산일 수도 있습니다. 사회가 정한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느끼며 스스로를 '루저'라고 여기는 순간들이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습니다.


이 책은 그런 우리들에게 유쾌하고 상쾌하며 통쾌한 '성장 비기'를 전해줍니다. 중요한 것은 남들의 기준에 맞춰 키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진짜 공'을 찾고, 나만의 방식으로 '혁명'을 일으키며, 나만의 '생존 수단'을 만들어가는 것이라고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세상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합과 체가 고군분투하는 농구 시합인데요. 합과 체가 키 크기에 성공했는지 여부는 알려드리지 않겠습니다만, 중요한 건 합과 체의 내면이 성장했다는 점일 겁니다. 아버지가 말한 '좋은 공의 조건'을 경기 중에 몸소 깨닫는 것처럼, 외부적인 변화보다 내적인 성장이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이겠죠.



삶은 계속되는 농구 경기처럼

"계절은 가을이었고, 바람은 상쾌했고, 하늘에는 누가 쏘았는지 모를 빛나는 공이 어제에 이어 오늘도, 오늘에 이어 내일도 쉬지 않고 튀어 오르고 있었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마치 우리의 삶을 이야기하는 듯합니다.

삶이라는 농구 경기에서 우리는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공을 놓치기도 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공이 튀어 오르는 한

우리는 계속해서 달리고

시도하고

자신만의 '진짜 공'을 찾아 나설 수 있다는 것이죠.


『합체』는 가볍게 읽히면서도 어느 순간 코끝을 찡하게 만드는 삶에 대한 깊은 시선을 담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루저라고 생각하는 우리 모두에게,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세상에 맞서 당당하게 살아갈 용기를 전해주는 박지리 작가님의 따뜻한 응원이 담겨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을 통해 당신만의 빛나는 공을 찾으시길.

그리고 그 공을 힘껏 하늘로 쏘아 올리는 멋진 삶을 살아가시길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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