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부당함에
나는 나의 죽음을 죽일 수 있다.
현호정 작가의 『단명소녀 투쟁기』를 읽고 난 뒤 오래 마음에 남은 문장입니다. 이 한 줄에는 삶과 죽음에 대한, 그리고 우리 각자가 짊어지고 살아가는 운명에 대한 깊고 단단한 의지가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력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맞서 싸우겠다는, 그래서 결국 이겨내겠다는 의지.
『단명소녀 투쟁기』를 읽으며 다시금 삶과 죽음, 그리고 그 경계에 선 인간의 본질적인 질문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관계의 복잡함과 불완전함 속에서 피어나는 우리 내면의 투쟁을 섬세하게 그려낸 이 작품은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의 의미를 되새기게 합니다.
현호정, 삶의 질문을 던지는 이야기꾼
현호정 작가는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이상하리 만치 흔들리는 문장들. 이상하게 쓰이기 위해 고르고 벼른 흔적이 역력한. 쓰고 지우기를 반복한 문장으로 낯선 정서를 통과시키려는 작가의 의도와 리듬감이 너무도 선명히 남아있어서요. 현호정 작가는 박지리문학상을 이 『단명소녀 투쟁기』로 수상하며 등단합니다. 작가의 작품들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독특한 상상력과 서사로 인간 본질과 사회의 이면을 탐색하는 것이 특징인 것 같아요. 특히 『단명소녀 투쟁기』에서 보여주는 설화를 재해석하는 방식, 그리고 디지털 미디어 시대의 스토리텔링 기법을 활용하는 점은 독보적인 문학 세계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작품 속에서 '죽음'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다루면서도 그것을 단순히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위한 투쟁'으로 그려내며 독자들에게 삶의 의미를 다시금 곱씹게 만듭니다.
스무 살 전 단명할 운명을 지닌 소녀의 긴 여정
『단명소녀 투쟁기』는 열아홉 살 소녀 구수정이 입시 전문 점쟁이를 찾아갔다가 '스무 살 전에 단명할 운명'이라는 예언을 듣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신인지 스님인지 무당인지 알 수 없는 북두라는 자의 예언에 수정은 절망하는 대신 '싫다면요?'라고 되묻고 자신의 삶을 이어 나가기 위한 긴 여정을 떠납니다. 죽음이 덮치기 전에, 그보다 먼저 달아나 살 작정으로 말이죠.
수정의 여행은 지극히 현실적인 G시의 지하철역에서 시작됩니다. 하지만 술에 취한 남자와의 만남, 그리고 갑작스레 나타난 날개 달린 사자만큼 커다란 개 '내일'의 등에 올라타면서 수정은 현실계를 벗어나 다른 세계로 이동하게 됩니다. 검은 산들이 둘러싼 분지에서 수정은 자신처럼 열아홉 살이지만 반대로 '죽기 위한 여정' 중에 있는 이안을 만나게 됩니다.
삶을 찾아 나선 수정과 죽음을 찾아 나선 이안. 극과 극의 목적을 가진 두 사람은 함께 여행을 하며 저승의 바위 사막, 마을, 강을 건너 작은 섬에 이르는 등 낯선 이계의 풍경 속에서 각자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미션을 수행해 나갑니다. 명부에 그려진 악사, 청소부, 눈-인간 등 기괴한 존재들을 죽여야만 수정은 삶에, 이안은 죽음에 이를 수 있다는 잔혹한 설정은 이 소설의 독특한 서사를 더욱 몰입하게 만듭니다.
생의 경계에서 피어나는 단단함
이 책을 읽으며 가장 깊이 새겨진 문장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수정이 느끼는 감정들과 맞닿아 있습니다. 특히 북두와 수정이 처음 마주하는 장면은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그 눈을 수정도 똑바로 봤다. 새카맣고 작은 눈동자가 깊고 멀었다. 우물에 빠진 채로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이런 느낌일까. 이렇게 막막하고 이렇게 두렵고 이렇게… 행복할까?
죽음을 예고하는 존재와의 만남에서 느껴지는 막막함과 두려움. 하지만 그 속에서 묘하게 피어나는 '행복할까?'라는 질문은 삶과 죽음에 대한 수정의 복합적인 감정을 보여줍니다. 어쩌면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상황 앞에서 비로소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는 역설적인 순간을 표현하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도 종종 예상치 못한 사건 앞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것처럼 말이죠.
북두가 설명하는 죽음의 모습 또한 제게는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죽음은 소나기처럼 움직인다고 북두는 설명했다. 지평선에서부터 먹구름과 비가 솨아아 달려오는 모양으로 죽음도 다가온다고. 그러므로 만약 구름이 움직이는 속도보다 더 빨리 달린다면 비를 맞지 않을 수 있듯이, 죽음과 반대 방향으로 계속 움직이면 죽음을 조금,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늦출 수 있다는 말이 되었다.
죽음을 소나기에 비유하고, 그보다 더 빨리 달리면 죽음을 피할 수 있다는 비유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움직임'과 '의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삶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세, 그것이 바로 단명이 예정된 수정이 삶을 투쟁하는 방식이 아닐까 싶었죠. 우리 역시 삶이라는 여정에서 닥쳐오는 수많은 어려움 앞에서 멈춰 서기보다 자신만의 속도로 나아가야 한다는 조용한 메시지를 던져주는 듯했습니다.
수정과 이안이 저승 신에게 각자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힘을 합치라는 북두의 조언은,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닌 '함께' 헤쳐나가야 할 삶의 과제를 상징하는 듯합니다.
— 함께 저승으로 가거라. 힘을 합쳐 문 앞에서 저승의 신을 붙잡아, 각자 원하는 것을 얻어 내렴.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죽음이라는 거대한 운명 앞에서, 수정과 이안은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 같은 곳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개인의 문제를 사회 전체의 문제로 인식하고, 서로 연대하여 해결해 나가야 함을 시사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위로와 함께, 함께라면 무엇이든 이겨낼 수 있다는 용기를 얻게 됩니다.
책 속에서 청소부라는 캐릭터를 통해 드러나는 '질서'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날카롭게 보여줍니다. 청소부는 '질서에 맞추어 모든 존재를 제자리에 놓아두는 일'을 자신의 역할이라고 주장하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능력이나 자격이 없는 자는 죽어도 무방하다는 궤변을 늘어놓습니다.
—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어린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저라고 늙은 몸을 쉬이고 싶은 마음이 없을까요. 그러나 제가 죽으면 마을은 지탱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악사는 다르지요. 음악이 없어도….
이 문장을 읽으며 저는 소위 '기성세대'라고 불리는 구성원들이 정해놓은 사회의 기준과 질서 속에서, 젊은 세대가 겪는 어려움을 떠올렸습니다. 특히 '대학 입시 결과에 따라 정상성 세계의 진입자 아니면 낙오자'로 분류되는 현실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경직된 시선으로 개인의 가치를 평가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수정은 이러한 기성세대의 궤변 속에서 미성년의 죽음이야말로 어긋난 질서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죽음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대신, 스스로의 삶을 쟁취하려는 수정의 투쟁은 사회가 정해놓은 부당한 질서에 맞서 싸우는 우리 시대 젊은이들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 같았습니다.
수정과 이안이 서로를 죽여야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마지막 미션은, 삶과 죽음, 그리고 관계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수정이 자신의 여정의 의미를 인식하며 내뱉는 말은 제 마음에 가장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 망친 게 아니야.
— 그럼?
— 구한 거야. 이룬 거야. 최선을 다했기에 흔적이 남은 거야.
— 그럼 잔해를 떠안고 살아가. 고약한 피 냄새에, 무질서에 익숙해질 각오를 해. 폐허를 쉼터로, 몰락을 휴식으로 착각하면서.
— 그게 네가 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경고야?
— ….
— 나에게 그런 것들은 이제 조금도 두렵지 않아. 그리고 나는 그것들의 이름을 실제로 바꾸어 부르겠어. 폐허를 쉼터로, 몰락을 휴식으로… 영원히…. 그러면 그건 더 이상 착각이 아니게 되겠지.
이 대화는 삶에서 마주하는 실패와 좌절, 그리고 그로 인해 남겨지는 흔적들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망친 것'이 아니라 '구한 것'이고, '이룬 것'이며, '최선을 다했기에 남은 흔적'이라는 수정의 깨달음은 우리의 삶을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중요한 자세를 일깨워줍니다. 폐허를 쉼터로, 몰락을 휴식으로 여기겠다는 결연한 의지는 외부의 부정적인 시선과 평가에 굴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삶을 재정의하겠다는 주체적인 선언과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삶의 역경 속에서 찾아야 할 '단단함'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두 단명(短命)을 타고난 단단(斷短)한 존재
현호정 작가의 『단명소녀 투쟁기』는 단순히 스무 살 전에 죽을 운명에 맞서는 한 소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는 오늘날 '단명'의 운명을 짊어진 채 안간힘을 쓰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경쟁 사회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하고, 때로는 실패와 좌절 속에서 마치 단명할 것 같은 압박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수정의 투쟁은 우리에게 희망을 보여줍니다. '나는 나의 죽음을 죽일 수 있다'는 결연한 의지처럼, 우리 또한 우리를 억압하고 죽음으로 이끄는 사회 시스템과 내면의 두려움에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단명소녀 투쟁기』는 섣부른 낙관론을 펼치기보다, 삶의 고통과 어려움을 직시하고 그 속에서 스스로 단단해질 것을 요구합니다.
관계의 불완전함 속에서 상처받고 사회의 부당한 질서 앞에서 좌절하며 때로는 죽음보다 나쁜 것들에 둘러싸여 삶의 의미를 잃어버릴 것 같은 순간에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수정이 자신의 운명에 '싫다면요?'라고 되물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삶의 부당함에 '싫다면요?'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용기는 '단명'이라는 운명을 '끊어낼' 수 있는 '단단함'에서 비롯될 것입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오늘날의 주요한 서사적 활동에 소설이라는 형식을 부여하고, '덧없이 공중에 흩어지는 이야기의 기억들이 조금 더 오래 생존하도록' 합니다. 수정과 이안의 여행이 소설 속 현실 세계에서 아무도 모르는 비밀로 남을지라도, 그들의 투쟁은 독자들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어 오래도록 기억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가 자신의 '단명'에 맞서 '단단'해질 것을 약속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간절히 바라봅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투쟁을 통해
단명소녀가 아닌 연명소녀로 살아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