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우리는 끝내 살아내고
우리의 삶은 어딘가 삐걱거리고, 때로는 예상치 못한 불운과 마주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작은 기적을 발견하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한 뼘씩 성장해 나가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겠죠.
이번에는 특유의 명랑함과 재치로 우리를 위로하는 작가, 정세랑의 『이만큼 가까이』를 통해 제가 얻은 인사이트를 나누려 합니다.
정세랑 작가는 주로 청춘의 성장통, 상실감, 그리고 그것을 치유해 나가는 과정을 섬세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냅니다. 때로는 기발한 상상력을 더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들기도 하고, 일상 속 작은 순간에서 특별한 의미를 찾아내는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죠. 그녀의 문장은 늘 기대보다 한 발 더 나아가는 재미를 선사하며 독자들에게 깊은 공감과 위로를 건넵니다.
『이만큼 가까이』는 이러한 세계를 잘 보여주는 작가의 초기작 중 하나입니다. 신도시 외곽의 작은 도시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여섯 친구들의 이야기를 통해 성장의 진통과 상실감, 그리고 이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담담하면서도 경쾌하게 담아냈습니다. 마치 우리의 학창 시절을 보는 듯 친근한 감성을 자극하며, 읽는 내내 따뜻한 미소를 짓게 만드는 소설이었어요.
낡은 2번 버스, 그리고 우리
소설은 파주와 일산을 오가는 '2번 버스'를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이 낡은 버스는 주인공 '나'와 주연, 송이, 수미, 민웅, 찬겸 등 여섯 명의 친구들이 학창 시절을 함께 보내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자 그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중요한 공간이 됩니다. 그들은 이 버스 안에서 음악을 듣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다, 짝사랑으로 아파하며 십 대의 덜컹거리는 길을 함께 헤쳐 나갑니다.
"2번 버스. 그 망할 버스에 대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그 버스를 빼놓고는 아무 얘기도 할 수 없다. (…) 우리 여섯 명은 곧 쓰러져 죽을 것 같지 않으면 매일 그 버스에 탔다. 누구 한 사람 타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해졌다. (…) 버스가 퍼져버리면 우리 여섯은 눈길을 헤치고 더 큰길로 나가기 위해 애를 썼다. 운동화가 젖는 건 예사였다. 발가락이 얼어 떨어져 나가지 않은 게 지금 와서도 다행이다. 그런 경험들이 우리를 우리로 만들었다. 2번 버스가 아니었다면 우리도 우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같이'의 가치에 대해 생각합니다. 어릴 적 친구들과 함께 경험했던 사소한 불편함이나 어려움들이 사실은 우리를 단단하게 만들고, 서로에게 의지하며 성장하게 하는 밑거름이 되는 것이죠. 낡은 2번 버스는 그들에게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것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위안을 얻으며, 흔들리지만 쓰러지지 않고 함께 지나온 시간의 상징이었어요. 비록 세상이 우리를 홀로 남겨두는 것 같아도, 곁에는 늘 묵묵히 함께 걸어가는 이들이 있다는 따뜻한 위로를 전해주는 듯했습니다.
권위와 나약함 사이의 코끼리
소설 속 주인공 '나'는 영화 미술 일을 하면서 감독들과의 관계에서 자신만의 방식을 지켜나갑니다. 그녀의 태도에서 제가 밑줄 그었던 문장들은, 사회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데요.
"감독들이 대부분은 함께 지내기 매우 힘든 사람들이어서도 그렇지만, 내가 권위에 별로 반응하지 않는 타입인 게 더 컸다. 좋은 어른은 좀처럼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나쁜 어른은 내세울 권위가 없다."
"... 감독들에 대한 나의 냉랭한 태도는 다른 스태프들에게 호감을 살 정도였다. 굽히는 사람이 아니다, 아부하는 사람이 아니다, 실력으로만 승부하는 사람이다, 그런 평판을 얻었다. 사실 그건 여차하면 그만두고 엄마랑 할머니랑 국숫집이나 해야지 하는 건성의 마음 때문이었지 실력이랑은 별로 상관없었다. 어차피 영화 해서 나오는 돈은 너무 적어서 뒤늦게나마 받을 때마다 코웃음이 나왔다. 떼이지만 않으면 다행인 그런 돈 때문에 안 그래도 코끼리만 한 감독들의 에고를 더 키워주긴 싫었다. 귀여운 코끼리가 아니다. 일 년에 사백여 명을 죽이는 코끼리다. 한 사람쯤 아부를 안 해줘야 덜 쿵쾅거린다."
주인공의 이러한 태도는 단순한 반항심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지키고, 부당한 권위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단단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을 겁니다. 특히 '일 년에 사백여 명을 죽이는 코끼리'라는 비유는, 과도한 에고와 불필요한 권위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지 날카롭게 꼬집는 듯했습니다. 때로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불필요한 아부를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자신을 지키고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성공이나 돈보다, 자신만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문장이었습니다.
첫사랑의 상실, 그리고 남겨진 흉터
소설은 첫사랑인 주완이와의 이야기를 통해 청춘의 아름다운 설렘과 동시에, 예기치 않은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을 섬세하게 다룹니다. 주완이와 함께 보냈던 '히치콕 주간', '우디 앨런 주간' 등은 영화를 통해 세상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 특별한 시간이었고, 그들은 서로에게 세상의 전부가 되어가고 있었지요. 하지만 행복했던 첫사랑은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어려움을 맞게 됩니다.
"주완이에게도 비슷한 곳에 흉터가 있었다. 수미와는 다른 쪽 눈이었지만, 흰 선이 남아 있었다. 주완이도 누구에게 맞았던 걸까. 일방적으로 맞은 걸까. 다른 누구를 때리려다 그랬던 걸까. 수미의 저 상처도 그런 흰 선으로 잘 아물까. 그렇게 가늘고 희미하게 아물기 전에 다시 다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너무 오래 수미를 쳐다봤는지 수미가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저쪽으로 젖히자 수미의 교복 칼라가 눈에 들어왔다. 그다지 깨끗한 상태가 아니었다. 우리 엄마가 봤더라면 난리를 치며 약을 풀어 담가놓을 만한 상태였기에 나도 고개를 돌렸다. 해결할 능력이 없는 문제에 마음을 쓰는 건 별로라고, 정말 별로라고 속으로 되뇌며 이어폰을 껴버렸다."
상처와 흉터에 대한 이 문장은, 비단 물리적인 상처뿐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남겨진 아픔까지도 의미하는 듯했습니다.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원치 않는 상처를 받기도 하고, 때로는 그 상처가 아물지 못한 채 흰 선처럼 남아 있기도 하지요. 주인공은 수미의 상처를 보며 주완이의 흉터를 떠올리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마음을 쓰는 것을 '별로'라고 이야기하며 이어폰을 끼웁니다. 이는 감당하기 힘든 아픔 앞에서 애써 외면하려는 청춘의 불안하고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아픔들이 모여 우리를 성장시키는 자양분이 된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살아내고야 마는 존재
소설은 첫사랑의 죽음이라는 상실 앞에 친구들이 느끼는 절망감과 동시에, 그것을 이겨내고 삶을 지속해 나가는 방식을 담담하게 그려냅니다. 특히 주연이의 대사는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데요.
"내 생각에, 인간은 잘못 설계된 것 같아."
주연이가 말했을 때 아무도 '왜 또?' 하고 반문하지 않았다.
"소중한 걸 끊임없이 잃을 수밖에 없는데, 사랑했던 사람들이 계속 죽어나갈 수밖에 없는데, 그걸 이겨내도록 설계되지 않았어."
우리는 그렇게 모여서 함께 망가지고 고장 나고 그러다 한 사람씩 사라질 것을 예감했으나 이른 포기의 달콤함 같은 것이 깃들어 있어서 그리 무거워지진 않았다. 열 개의 인디언 인형처럼 하나씩, 운이 좋으면 길게 머물 거고 아니라면 순식간에 사라질 것이었다. 순서를 기다리면서 담담하게 치킨을 먹고 생일 파티를 하고 경조사를 챙겼다. 살아진다는 어른들의 말에 진저리를 내면서도 살아졌다.
이 문장은 삶의 본질적인 비극성을 정면으로 응시하게 합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소중한 것들이 사라지는 경험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주연이의 말처럼, 그러한 상실을 온전히 이겨내도록 설계되지 않은 것만 같은 무력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소설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주인공과 친구들은 함께 망가지고 고장 나면서도, 이른 포기의 달콤함 속에 담담하게 삶을 이어갑니다. 마치 열 개의 인디언 인형처럼, 언젠가는 사라질 것을 예감하면서도 현재를 살아내는 것이지요. 어른들이 말하는 '살아진다'는 말이 때로는 진저리 나게 느껴져도, 결국 우리는 살아내고 마는 존재라는 것을 담담하게 보여주는 문장이었습니다. 이는 곧 슬픔과 상실 속에서도 삶은 계속된다는, 무심하지만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듯했습니다.
불운으로부터 비롯된 존재들
소설은 우리가 마주하는 불운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찾아오는 불운이 우리의 삶을 뒤흔들고, 우리가 존재하게 된 근원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말이죠.
"그러나 사실 불운은 늘 기분 나쁘게 도사리고 있었다. 잠시라도 잊으면 말도 안 되게 끔찍한 짓을 저질러 우리를 환기시킨다. 아주 가까이에 있어, 이만큼 널 흔들어 놓을 수 있어. 쉽게 죽일 수도 있어. 그런 식으로 난데없이 공격받으며 살아가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는 그런 불운으로부터 비롯된 존재이기도 하다. 내가 삼팔선을 넘은 할아버지의 불운에서 태어난 것처럼. 나의 뿌리는 불운이요, 나를 키운 것도 불운이요, 내가 끝내 다다를 결말 역시 불운이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적겠지만 말이다."
이 문장은 저에게 꽤나 충격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불운을 피하고 싶어 하고, 그것이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를 바라지요. 하지만 작가는 불운이 늘 우리 가까이에 도사리고 있으며, 때로는 우리의 존재 자체가 불운으로부터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는 역설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전쟁과 같은 거대한 불운 속에서 할아버지가 삼팔선을 넘어왔기에 '나'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죠. 이는 삶의 아이러니와 함께, 우리가 마주하는 불운조차도 결국은 우리 삶의 일부이자 우리를 만들어가는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깊은 통찰을 선사합니다. 어쩌면 불운은 우리를 좌절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고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요.
눈물 냄새를 맡는 사슴처럼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는 주완이의 눈물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는 단순한 비유를 넘어, 사랑하는 존재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공감, 그리고 치유의 과정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어미 사슴은 풀숲에 숨겨놓은 아기 사슴의 눈물 냄새를 맡을 수 있다고 했다. 사슴마다 눈물 냄새가 고유해서, 바로 구별해 낸 다음 달려가 달래줄 수 있다고 말이다. 우리 동네는 밤이 되면 사슴과(科) 동물들이 내려오는 사슴의 나라였다. 특히 고라니나 노루가 많았다. 밤이 물러가도 눈물 냄새는 남겨놓아서 우리는 언제나 그 남은 입자들을 들이마시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는 주완이의 눈물 냄새를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픔과 슬픔을 알아채고, 달려가 위로해 줄 수 있는 능력. 그것은 어쩌면 사슴의 능력처럼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경험을 통해 깊어지는 마음의 지혜일 것입니다. 소설 속 친구들은 주완이의 죽음이라는 상실 앞에서 통곡하기보다는, 기나긴 시간을 건너는 법을 배우고 서로의 시간을 이해하고 견뎌냅니다. 그 과정 속에서 아팠던 상처는 희미한 흉터로 남게 되고, 굳이 쿨하지 않아도 괜찮은 상태로 서로를 지켜주는 '우리'가 되어가는 것이죠.
삶의 불완전함을 끌어안는 용기
정세랑 작가의 『이만큼 가까이』는 잊고 지낸 우리의 학창 시절을 되돌아보게 하는 작품이었습니다. 완벽하지 않고, 때로는 아프고, 때로는 좌절하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 서로에게 위안이 되고 힘이 되어주며 성장해 나가는.
‘있는 듯 없는 듯 살다 간 사람, 있다가 없어진 사람, 있어도 없어도 좋을 사람, 없어도 있는 것 같은 사람, 있다가 없다가 하는 사람, 있어줬으면 하는 사람, 없어져버렸으면 하는 사람, 없느니만도 못한 사람, 있을 땐 있는 사람, 없는 줄 알았는 데 있었던 사람, 모든 곳에 있었던 사람, 아무 데도 없었던 사람, 있는 동시에 없는 사람, 오로지 있는 사람, 도무지 없는 사람, 있다는 걸 확인시켜 주는 사람, 없다는 걸 확인시켜주지 않는 사람, 있어야 할 데 없는 사람, 없어야 할 데 있는 사람......... 우리는 언제고 그중 하나, 혹은 둘에 해당되었다’
위 문장처럼,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존재로 삶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 불완전함을 끌어안고, 서로의 아픔을 보듬으며 '이만큼 가까이' 함께 걸어가는 것이 바로 삶의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소설은 슬픔과 상실의 시간을 지나온 주인공과 친구들이 이제 '안정된 음역'을 지닌 삼십 대의 목소리로 편안하게 서로에게 말을 건넨다고 말합니다. 이는 곧 시간이 흐르면서 상처가 아물고, 그 아픔 속에서 더 단단하고 지혜로운 존재로 성장한다는 의미겠지요. 반짝이던 첫사랑과의 순간들을 그리워하면서도, 현재의 우리를 소중히 여기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 것. 이것이 바로 『이만큼 가까이』가 우리에게 건네는 따뜻한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단지 소설 속 인물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건네는 말처럼 느껴졌습니다. 청춘의 서툰 사랑과 상실, 어른이 되어 마주하는 권위와 불운, 그리고 끝내 살아내고야 마는 존재로서의 우리 삶. 『이만큼 가까이』는 그 모든 굴곡 속에서도 여전히 곁에 머물러 주는 사람들이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삶은 언제나 불완전하고 완벽한 해답은 주어지지 않지만, 누군가의 눈물 냄새를 알아채고 불완전한 모습 그대로 곁을 내어주는 순간들 속에서 우리는 조금 더 단단해지고 조금 더 다정해질 겁니다. 그래서 결국 중요한 건 멀리서 반짝이는 어떤 이상이 아니라, 지금 내 옆에서 이만큼 가까이 함께 걸어주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결국 삶은 덜컹거리는 버스처럼 흔들리며 흘러가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눈물 냄새를 알아보고, 흉터를 쓰다듬으며 다시 일어섭니다. 완전하지 않아 더 아름다운 순간들, 사라졌지만 여전히 곁에 남아 있는 목소리들, 그 모든 것이 모여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을 겁니다.
『이만큼 가까이』는 말합니다.
멀리서 반짝이는 무언가가 아니라
바로 곁에서 이만큼 가까이
손 내밀어 주는 사람이 삶의 기적이라고.
그래서 우리는 끝내 살아내고
다시 사랑하며
또다시 걸어갑니다.
불완전함을 끌어안은 채
그러나 다정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