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역사 속에 우리가 존재하게 된 것은
우주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그리고 왜 우리는 지금 여기에 존재하게 되었을까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한 번쯤 해봤을 질문일 겁니다. 스티븐 호킹이 평생을 바쳐 탐구한 것도 바로 이런 질문이었죠. 그리고 그의 마지막 동반자였던 토마스 헤르토흐가 『시간의 기원』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는 것은 호킹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고민했던 우주의 비밀입니다.
토마스 헤르토흐는 벨기에 루뱅가톨릭대학교의 이론물리학 교수로, 1998년부터 20년간 호킹의 가장 가까운 연구 파트너였습니다. 단순히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넘어 우주의 기원을 함께 탐구하는 동반자였죠. 헤르토흐는 호킹이 배출한 수많은 뛰어난 물리학자 중 하나이면서 동시에 호킹의 마지막 이론을 세상에 전하는 유일한 증인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과학서이자 회고록입니다. 호킹의 연구 성과를 설명하는 동시에 루게릭병으로 몸이 부자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우주의 비밀을 탐구했던 한 인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휠체어에 몸을 맡기고 컴퓨터로 세상과 소통하던 물리학자의 모습 뒤에 숨겨진, 유머를 잃지 않고 끝까지 호기심을 품었던 진정한 탐구자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뉴턴에서 시작된 물리학의 여정
헤르토흐는 우주론의 역사를 뉴턴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풀어냅니다. 뉴턴의 위대함은 단순함에 있었어요. '그는 단 몇 개의 수학 방정식을 사용하여 행성의 움직임을 말끔하게 설명했고, 태양계의 운동을 서술하는 기존의 모형들은 그의 원리에 따라 마술의 영역에서 현대물리학으로 환골탈태했다.' 뉴턴 이후 모든 물리학자들이 추구하게 된 것이 바로 이런 명쾌함이었죠. 복잡한 현상을 간단한 법칙으로 설명하는 것. 그것이 과학의 이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과학자들은 우주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특히 진화론이 등장하면서 결정론적 세계관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진화를 간단히 표현하면 '끊임없이 일어나는 우연한 사건의 사슬'이다. 낮은 수준의 복잡성은 높은 수준의 진화를 위한 환경을 조성하지만, 바로 이것 때문에 진화 과정에서 가능성이 희박한 경로가 선택되고 결정론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이 문장을 읽으며 저는 우리 삶도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계획하고 의도한 대로만 흘러가는 삶은 없겠죠. 예상치 못한 만남, 우연한 기회, 뜻밖의 어려움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면서 우리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곳에 서 있게 됩니다. 진화가 그런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우연과 필연이 얽히며 만들어내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생명친화적 우주의 비밀
호킹과 헤르토흐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질문은 '우주는 왜 생명체에게 우호적인 곳이 되었는가?'였습니다. 이 질문에는 놀라운 사실이 전제되어 있어요. '우주는 여러 면에서 생명체의 생존에 알맞게 세팅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물리학적인 상수들이 조금만 달랐어도, 별이 형성되지 못했거나 생명체가 탄생할 수 없었을 거라는 의미 이기도합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인간원리입니다. 물리학자 브랜든 카터의 말을 인용하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전혀 특별하지 않다면, 자신이 관측한 우주를 잘못 해석할 여지가 있다. 우리가 생명친화적인 우주를 관측하게 된 진짜 이유는 자신이 '그런 우주'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 관점은 기존의 과학적 사고를 뒤흔드는 것이었습니다. 우주가 먼저 있고 그 안에서 우연히 생명이 탄생한 것이 아니라,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 우주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관측할 수 있다는 거죠. 순서가 바뀐 겁니다.
호킹의 마지막 이론: 하향식 우주론
초기에 호킹은 빅뱅 깊은 곳에 숨겨진 무언가를 수학이 모두 설명해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상향식 접근법이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연구를 거듭하면서 그는 생각을 바꾸게 됩니다. 다중우주 이론의 한계를 깨닫고, 전혀 다른 관점에서 우주를 바라보기 시작한 거예요.
'무경계 가설에 의하면 창조의 순간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구조적 특성이 점차 변하거나 사라지다가 결국에는 시간까지 사라진다.' 시간 자체가 사라지는 지점에서 우주를 바라본다는 것,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호킹의 통찰이 빛을 발합니다. '호킹의 최종 이론에서 '시간의 기원'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시작점이 아니라, 우리가 알아낼 수 있는 과거의 한계점이다.'
이 문장을 읽으며,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린 시절의 순간을 떠올려봤습니다. 그 이전에도 분명 우리는 존재했지만 기억이라는 인식의 한계 때문에 그 너머는 알 수 없죠. 시간의 기원도 그런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절대적인 시작이 아니라 우리가 물리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는 영역의 경계선 이란 의미입니다.
호킹의 하향식 접근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측자의 역할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론상에서 '발생 확률이 가장 높은 우주'가 아니라, '관측될 확률이 가장 높은 우주'다.' 우주의 역사는 우리가 어떤 질문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거죠. 마치 양자역학에서 관측이 현실을 결정하는 것처럼요.
물리법칙도 진화한다
호킹과 헤르토흐가 도달한 결론 중 가장 혁신적인 것은 물리법칙 자체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우주와 함께 진화해 왔다는 이론입니다. 이것이 이 책의 제목이 다윈의 『종의 기원』을 연상시키는 이유죠.
'액체가 고체보다 대칭성이 높다는 뜻인가? 그렇다. 물의 분자 배열 상태는 어떤 방향에서 봐도 똑같다. 다시 말해서, 물은 회전 대칭을 갖고 있다. 반면에 얼음 결정은 기하학적으로 규칙적인 구조를 갖고 있는데, 이는 곧 물에 존재했던 회전 대칭이 붕괴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비유를 통해 헤르토흐는 우주 초기의 높은 대칭성이 어떻게 깨지면서 현재의 복잡한 물리법칙들이 생겨났는지를 설명합니다. 우주가 식어가면서 대칭성이 단계적으로 깨지고, 그 과정에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법칙들이 형성되었다는 거죠.
과학과 철학의 경계에서
호킹의 이론이 흥미로운 점은 과학의 한계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칼 포퍼의 반증가능성 원리를 인용하며, '반증 가능한 이론을 포기하고 반증 불가능한 이론을 수용하는 순간, 과학의 기능은 중단되고 과학으로부터 새로운 지식을 얻는 것도 불가능해진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주의 기원을 탐구하다 보면 불가피하게 과학의 경계를 넘나들 수밖에 없다는 것도 인정하는데요. 시간이 사라지는 지점에서, 인과율이 의미를 잃는 순간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철학적 언어를 빌려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겸손함이야말로 진정한 과학자의 자세가 아닐까 싶습니다.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고, 자신들이 탐구할 수 있는 영역의 한계를 명확히 하면서도 그 경계를 조금씩 넓혀가는 것. 그것이 바로 호킹과 헤르토흐가 보여준 과학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도 우주를 창조하고 있다
이 책에서 인상 깊었던 통찰 중의 하나는, 우리가 단순히 우주의 관찰자가 아니라 창조자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하향식 우주론에 따르면 우주가 우리를 창조했듯이 우리도 우주를 창조하고 있어요. 우리가 하는 질문, 우리가 하는 관측이 우주의 역사를 결정한다는 것이죠.
이것은 단순히 물리학적 명제가 아니라 철학적, 심지어 실존적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는 수동적으로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현실을 만들어가는 존재라는 뜻이거든요.
생각해 보면 우리 일상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같은 상황이라도 어떤 질문을 하느냐,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가 됩니다. 실패를 '끝'으로 볼 것인가, '새로운 시작'으로 볼 것인가. 만남을 '우연'으로 여길 것인가, '필연'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우리가 던지는 질문이 우리 삶의 의미를 결정하는 거죠.
스티븐 호킹이라는 사람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인상 깊었던 것은 호킹의 인간적인 모습들이었습니다. 헤르토흐는 호킹을 단순히 위대한 물리학자로만 그리지 않아요. 루게릭병 진단을 받고도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세상을 경험하며 끝까지 유머를 잃지 않았던 한 인간의 모습으로 남겨두었습니다.
'호킹에게는 마법 같은 구석이 있었다. 늘 지혜와 재미가 섞인 화법을 구사했고 진정으로 유머를 사랑했다.' 몸은 휠체어에 갇혀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이 세상 누구보다 자유로웠던 사람. 그런 호킹의 모습에서 우리는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시간 속에서 길어 올린 의미
결국 『시간의 기원』은 우주의 기원을 찾는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의미의 기원을 찾는 이야기입니다. 시간이 사라지는 지점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호킹과 헤르토흐가 발견한 것은, 우주가 단순히 물리법칙을 따르는 기계가 아니라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살아있는 존재라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그 우주 안에서 우리는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라 적극적인 참여자로서 존재합니다. 우리가 던지는 질문이, 우리가 하는 선택이 우주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의미죠. 이것은 엄청난 책임감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무한한 가능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호킹은 '뿌리를 얼마나 깊이 이해하는가에 따라 인류의 미래가 좌우된다'라고 믿었습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야 어디로 가야 할지도 알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우주론은 단순히 학문적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려주는 나침반이기도 합니다.
140억 년 우주의 역사 속에서 우리가 존재하게 된 것은 정말 기적 같은 일입니다. 수많은 우연과 필연이 겹쳐서 만들어진 이 순간,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는 우주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죠. 그리고 그 이해 자체가 우주를 만들어가는 과정의 일부라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하고 의미 있는지 알게 됩니다.
그러니 『시간의 기원』은 단지 우주의 시작에 관한 책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를 어떻게 이해하고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물리학이라는 언어로 쓰였지만, 그 안에는 인간에 대한 사유가 녹아 있고, 삶의 방향을 묻는 목소리가 숨어 있습니다. 질문을 멈추지 않는 태도, 관측을 통해 세계를 해석하려는 의지, 설명되지 않는 것을 기꺼이 껴안는 용기 - 호킹이 끝까지 놓지 않았던 이 자세들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잃지 말아야 할 삶의 감각과 닮아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만들어가는 시간은, 그런 태도 위에서 더욱 단단해지는 것 같습니다. 질문을 품고 살아가는 삶, 우연과 불확실성 속에서도 나만의 세계를 끊임없이 구성해 나가는 삶. 그것이 우리가 진짜로 살아낸 시간의 모습이 아닐까요.
열대야로 잠 못 드는 요즘,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 번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요.
우주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그리고 나는, 왜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걸까.
그 질문 앞에 머무는 짧은 순간에
우리는 조금 더 나다워지고, 조금 더 단단해진 사람이 되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