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내가 떠난 이유&스텝 생활의 생리 (ft. 고달픈 애환)
꿈같던 시절이 지났다. 매일 같은 일상으로 무뎌졌던 내게 한없는 행복과 평화를 주었던 제주살이의 끝은, 인생의 한 챕터가 접히는 기분을 주었다. 마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입학을 앞뒀던, 모든 게 생경했던 그때의 나처럼.
호주 워킹홀리데이가 코로나로 무산된 후, 취준생도 아니고 완전 백수도 아닌 상태로 허송세월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갑자기 FEEL을 받아 게하 스텝에 지원했고 바로 다음날 합격 전화를 받았다.
제주도행을 마음먹은 지 3일 만에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긴 약 세 달간 제주바다 내음을 받으며 살다가 돌아왔다. 그간 제주도 생활을 청산하며, 본격적인 육지 생활을 시작하기 전 마음도 정리할 겸. 게하 스텝을 하면서 배운 것과 장단점, 그리고 비용까지 찬찬히 정리해보고자 한다.
4월부터 6월까지
제주에 살다 온 이야기
나는 대학교를 마친 2019년 초,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나려고 했었다. 새로운 문화와 사람들, 내가 알던 것과 완전히 다른 곳에서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싶었다.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무산되었고 한동안 멘탈이 바사삭 부서진 상태로 하루하루 무료하고 비생산적이며 우울하게 지냈다. 딱 1년간 호주에서 자유로운 생활을 한 뒤 취업 준비를 하겠다는 나의 드림 플랜이 무너져버린 것이다. 당장 취업준비를 하기엔 내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고, 그렇다고 한국에 있으면서 호주에 간 것만큼 자유롭게 살 수도 없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한동안 집에만 처박혀 지냈다.
그러다가 우연히 인터넷에서 제주도 게하 스텝으로 한 달 살기를 할 수 있다는 글을 보게 되었다. 게스트하우스에 노동을 제공하면 금전적 대가 대신 의식주를 제공받으며 살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때 시각이 새벽 1시였다. 본래 실행력이 매우 낮은 나지만, 순간 이게 아니면 몇 달을 또 버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문의 자기소개 문자를 작성해놓고 다음날 아침 괜찮아 보이는 게스트하우스 공지 글에 문자를 돌렸다. 운 좋게도 3곳에서 문자를 받았고, 가장 일의 강도도 낮고 커피 일을 배워볼 수 있다는 메리트도 있는 게하로 떠나게 되었다.
제주도 게하 스텝,
노동의 강도는?
다행히 내가 일했던 게하는 스텝에게 객실 청소를 시키지 않았다. 그 덕에 일적으로 힘든 점은 없었다. 카페와 함께 운영되는 게하였기 때문에 나의 업무는 카페 5시간 근무와 객실 안내, (파티가 있을 시) 파티 준비와 정리, 참석하는 정도의 일이었다. 코로나의 영향이 덜한 청정 제주였기 때문에 코로나가 남의 일처럼 느껴질 정도로 무뎌지기도 했다. 하지만 코로나 때문에 게하에 손님이 적었고, 파티가 진행되는 날도 많지 않았다.
아차 4월 황금연휴 제외.. 이땐 정말 말 그대로 스텝들 갈려가며 일했다.
숙식제공의 의미
나의 근무 조건은 2일 근무 2일 휴무로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어찌어찌 잘 놀러 다녔다. (2일 근무 5일 휴무인 곳도 있다.) 내가 한 달에 15일 5시간씩 노동을 하면 잠자리와 점심, 저녁 식사를 챙겨주었다. 숙소는 게하 스텝, 매니저, 사장님이 함께 쓰는 별채였다.
식당 근무 경험이 있는 매니저들이 밥을 아주 잘해주셔서 돈도 아끼고 (음주로 빼앗긴) 기력도 보충할 수 있었다. 이렇게 집밥처럼 식사를 잘 챙겨주는 게 좋았던 이유는 스텝들끼리 함께 밥을 먹으며 정말 식구처럼 지내게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 스텝 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참 가관인 곳이 많았다. 기본적 요리 도구도 없는 부엌 구색만 갖춰놓고는 알아서 해 먹으라고 방치하는 곳은 양반이었다. 심지어 요리할 양파도 알아서 사 먹으라고 할 정도로 야박하면서 여자 스텝들은 파티에 접대시키듯이 투입하는 유명 파티 게스트하우스도 있다.
기본적인 근무조건도 챙겨주지 않는 곳도 많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잘 알아봐야 하고, 또 부당하다 싶으면 다른 곳으로 옮기는 걸 고려해보길 추천한다. 공짜로 일해주려고 제주도에 온 것은 아니지 않은가?
월급 받는 게
과연 좋은 걸까?
내가 월급 주는 게스트하우스를 찾지 않은 이유는 장기 여행자라는 신분에 있었다. 제주도에 굳이 스텝으로 가는 이유는, 일을 하면서 여행하기 위해 서지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또 돈을 받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상하관계와 고용관계에 얽히기도 싫었다. 차피 월급 받아봤자 시급에도 못 미치는 돈을 받아야 하는데, 굳이 그 돈을 받아 가며 불편함을 감수해야 할까.
어디선가 '스텝에게 월급을 준다는 건 돈 주는 만큼 맘껏 부려먹겠다는 뜻'이라는 글을 봤다. 게하 스텝 하겠다는 젊은이들이 워낙 많다 보니 양심 없이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데만 혈안 된 사장들도 많다. 그러니 주의해야 한다.
솔향을 머금은 글과 사진을 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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