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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 Mar 02. 2021

눈 내린 창경궁에서 생일 도시락을 먹다.

어른 흉내를 내고 있는 청소년

Phto by. 솔립


 눈이 하얗게 내려앉은 창경궁에서 도시락을 먹은 적 있다. 그날은 나의 생일이었다. 태어난 지 꼬박 스물두 해째 되는 날이기도 했다. 불과 몇 년 전, 교복을 입은 내가 부푼 가슴으로 상상하던 이십 대 모습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회사에 적응하지 못하고 겉도는 일개 인턴 나부랭이.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우울했으며, 사회가 바라는 평범이란 기준에도 미치지 못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미생未生인 상태였다.



 회사에서는 생일 축하 받을 사람이 없었기에 동생이 싸준 도시락을 들고 조용히 창경궁으로 향했다. 언니를 가여이 여긴 동생이 서툰 솜씨를 발휘해 도시락을 싸준 것이다. 손바닥만한 반찬통에 꾹꾹 눌러 만든 주먹밥을 담고 먹음직스러워 보이게 깨를 뿌렸다. 어디서 본 건 있는 모양이다. 다른 통에는 요새 유행한다는 소떡소떡 꼬치를 넣고 다른 톤에는 내가 좋아하는 반찬을 가득 담았다. 처량히 생일을 보낼 언니를 빤히 아는 동생은 그렇게 자신의 사랑을 표현했다.


 창경궁 입장료는 700원. 이제 만 22년을 산 나는 청소년 요금을 낸다. 열심히 어른 흉내를 내고 있는데 청소년이란다. 자존심이 상하면서 동시에 안도감이 느껴진다. 아직 어른이지 않아도 되는 나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막힌 것 같던 목이 뚫린 기분을 느낀다. 


Phto by. 솔립


 오후 12시의 창경궁. 점심시간이라 사람이 별로 없을 거란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정장 입은 회사원들이 종종걸음으로 산책하고 있었다. 도시락을 싸 온 직장인도 하나둘 보였다. '도심 속에서 이런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구나' 나는 오갈 데가 없어 온 거지만, 나도 저들처럼 걱정 없이 그저 바쁜 일상 속 여유를 즐기러 온 어른이 된 것만 같았다.


 창경궁의 꽝꽝 언 연못에 따스한 햇볕이 비친다. 2월이라 날이 풀렸대도 벤치에 앉아서 젓가락질 할 수 있는 날씨는 절대 아니다. 찬 공기 탓에 밖에 앉아있는 자체가 추웠지만 어쩔 방도가 없다. 사무실에서 불편하게 있는 것보다 이 추위가 몇 배는 낫다. 꾹 참고 차가운 벤치를 패딩 끝자락으로 녹였다. 도시락을 싼 보자기를 여니 동생이 못생긴 글씨로 쓴 편지가 나왔다. 몇 글자 읽자 차갑게 얼었던 얼굴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거 준비한다고 나보다 일찍 일어나 부산을 떨었을 동생이 생각나서 웃음이 났다. 요리도 못하는 게 꽤 그럴싸한 걸 만들었다. 도시락은 차가웠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맛과 의미를 세기며 쌀 한 톨까지 열심히 씹어댔다. 마지막 김치 한 조각까지 꼭꼭 씹어 모두 소화시켰다. 


 이날부터 나는 생일에 초연한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나를 아는 모든 사람에게 내 생일을 알려주는 카카오톡 생일 알람을 지웠다. 내가 생일 축하 메시지를 보냈던 친구가 왜 내 생일에 연락이 없는지를 고민하지 않는다. 이제 생일은, 인생에서 떼어낼 수 없는 소중한 소수의 사람에게 축하받는 것만으로 충분한 이유가 있는 날이니까. 그거면 충분한 하루니까 말이다.


 그날 창경궁엔 소복이 눈이 내렸다.


[눈 내린 창경궁에서 생일 도시락을 먹다.-솔립]






ps

1. 미키마우스 케이크-언니가 좋아하는 치즈케이크를 구하지 못한 동생은 집에 있는 과자로 케이크를 만들어 축하 노래를 불러줬다. 다행히 저녁에는 치즈케이크를 구해 가족 모두에게 생일 축하를 받았다.

2. 도시락 포장-우리 언니 기죽지 말라고 스타벅스 종이가방에 피자 리본을 묶어 도시락을 담아준 동생. 역시 나를 제일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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