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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 Feb 07. 2020

빠이, 바쁜 하루보단 충실한 하루

아무것도 한 게 없다며 당신의 하루를 무시하고 있지 않은지 걱정이다

해먹에 누워 책과 밀크티, 이미 충분한 하루


태국의 작은 시골 마을, 빠이에 머무른 지 딱 일주일이 되었을 때. 게스트하우스에서 뒹굴대던 나는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나에게 주어진 여행이라는 인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소중한 시간을 잘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빠이는 ‘관광지’라고 할만한 스팟이 몇 군데 되지 않기 때문에 사실 3일이면 충분히 다 돌아본다.

나는 그런 스팟을 한 곳이라도 들르지 않으면 ‘절대 안 되는 것’으로 아는, 마음의 크기가 얕고 좁은 여행자였다. 1평짜리 마음을 가진 여행자였던 나는 조바심을 부려 빠이에 도착한 지 3일 만에 ‘빠이 가볼 만한 곳’이라고 검색해서 나온 곳들을 모두 돌아봤다. 그러자 그다음 날부터 더 이상 가볼 만한 곳이 없는 빠이에 남아있는 게 불안해졌다.


평화로운 빠이에 더 머물고 싶은 건 확실했다. 그런데 새로운 걸 하지 않는 하루는 견딜 수 없었다.


일찍 일어나 동네를 산책하고 해먹에 누워 책을 읽다가 여행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저녁에 맥주를 마시고 돌아오면 저녁이었다. 내가 바라던 평화로운 일상이었지만 불안은 점점 더 심해졌다. 여행까지 와놓고 아무것도 안 하는 나 자신이 너무 싫었다.



그런데 문득 여행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서울에서 삶을 대하던 나의 태도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도 무기력하게 주말을 누워서 넷플릭스나 보면서 보내는 나 자신을 보고 엄청난 자괴감을 느꼈다. 이 감정은 나를 ‘뭐라도 하고 자야지’라는 강박으로 이끌어 새벽 4시에 자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 짓을 빠이에서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전긍긍 불안해하는 나에게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두 친구는 다른 조언을 해줬다.

'a: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왜 불안하지? 왜 여행까지 와서 불안해해? 그럴 거면 여행 왜 온 거야?‘

‘b:

아무것도 안 하기는! 너 오늘 빨래도 맡기러 갔다 오고 편의점도 갔다 왔잖아. 완전 바빴는데?’


첫 번째 말은 한 귀로 흘렸다. 아무리 불안을 떨치려고 온 여행이라도 여행 중 불안해하는 내 감정을 온전히 느끼는 건 나의 몫이다. 그 누구도 불안을 느끼는 나에게 옳고 그름을 말할 수 없다. 대신 두 번째 말을 받아들였다. 그저 일상의 작은 이벤트도 순간에 충실하다면 충분한 하루가 된다는 조언.


나는 점점 나를 놓아주었다. 맛있는 저녁을 먹는 것도, 해먹에 누워 책을 읽는 것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 '아니란 걸' 배웠다. 삼류 자기 계발서 목차에 쓰여 있을 것 같은 말이지만,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아’를 되뇌이며 스스로를 달랬다.

여행에서 꼭 무언가를 거창한 걸 해야만 하는 이유 따위 없다. 이 순간을 여행으로 받아들일지, 아무것도 안 하는 공백으로 받아들일지는 모두 내가 정하는 거다.


마찬가지로 여행에서 '아무것도 안 하면 안 될 이유'도 없다. 공백 때 왜 아무것도 안 했냐고 캐물을 면접관은 없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더 현명하지 않은가?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안 했다는 말은 생산성 있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과연 말은 아무것도 안 한다고 하지만, 정말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까?


오늘은 해먹에 누워서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읽다가 잠에 들었다. 햇살이 밝아 깬 나는 게스트하우스에 새로 체크인한 대만 친구에게 인사를 건넨다. 대화가 끊길 때쯤 냉장고에 가서 어제 사온 드래곤 후르츠와 망고를 썰어온다. 용기를 내 초면인 게스트들에게도 건네 본다. 배가 부르니 또 잠이 온다. 이따가 6시에 일어나서 저녁 먹으러 가야지.


숙소에 머물렀음에도 참 많은 일이 나에게 생겼다. 이런 선명한 경험이 단지 생산성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는가?



유독 한국인들은 생산성 없는 시간에 대해 엄격하다. 여행에서 만난 한국 사람들은 (나이가 많을수록) 십중팔구 여행까지 와서 한국에서의 삶의 패턴을 따랐고 그걸 남에게 강요했다. 맥주집에서 매우 예의 없는 40대 남자를 만난 적이 있다.


오늘 뭐 했냐는 질문에 ‘오늘 그냥 해먹에 누워있다가 우체국 들렀다가 왔어요.’

그럼 꼭 한 마디씩 ‘그럼 아무것도 안 한 거네요? 여행왔는데 어떻게 그러지?’

마치 여행은 이런 거다라고 가르치듯 거든다. 난 속으로 이렇게 자신의 여행관에 남을 끼워 맞추려는 추한 짓은 하지 않아야겠다 다짐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며

당신의 하루를 무시하고 있지 않은지 걱정이 된다.

이불에서 일어나 다시 이불로 돌아오기까지,

당신은 살아낸 것만으로도 이미 충실히 하루를 보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일지라도

생산성이라곤 없는 취미라도

온종일 드라마만 봤을지라도

그게 당신이 하고 싶었던 거라면, 그걸로 충분하다.


바쁜 하루보단 충실한 하루를 보내는 우리가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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