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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 Feb 06. 2020

엄마랑 동갑, 이제야 알게 된 것

자신을 믿고 인생을 결정한 동갑내기 23살이 보인다.


떠나기 전날, 동생이 자신의 엑스에게 받은 노트를 나에게 선물했다. 다시는 꼴도 보기 싫다는 이유에서였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는, 꽤나 감성적이고 힙한 문구가 적힌 노트다. 가볍고 질 좋은 노트를 얻게 된 나는 여행 내내 힙색 안에 넣고 다니며, 종이커버가 가죽 질감이 될 때까지 가지고 다녔다.  


미얀마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노트의 첫 면을 펼쳤다. 어떤 글을 처음으로 적을까. 첫 글은 언제나 큰 의미를 갖는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터라 하늘 위에 떠 있다는 사실이 무서우면서도, 꽤 많은 생각을 했다. 어렵게 펜을 들어 적은 이야기는 결국 엄마였다. 신기했던 건 평소 하던 엄마에 대한 연민이나 걱정이 아닌 대단함에 대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나를 가졌던 1996년의 엄마는 23살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현실을 피해 도피하고 있는 지금의 나와 같은 나이이다. 엄마가 인생을 함께하고 싶은 사람을 만나 평생을 함께할 거란 확신으로 결혼을 결정했던 나이에, 나는 앞으로 뭘 하고 먹고살지도 결정하지 못한 채 그저 청춘을 즐기겠다며 여행을 떠나고 있다. 갑자기 23살 엄마의 무모함이 대단해 보였다.


나는 사랑은커녕 내 앞가림하기도 어려울 때

엄마는 인생을 결정했구나.


그동안 나는 엄마를 많이 비난해왔다.

어떻게 그런 어린 나이에 결혼을 결심할 수 있냐고, 미래 걱정은 안 한 거냐고. 엄마 결정의 결과물인 나의 존재까지 부정하면서 엄마를 비난해왔다.


하지만

그때 엄마의 나이가 되어 생각해보니

이제야 원망의 맘이 눈 녹듯 사라지고,

자신을 믿고 인생을 결정한 대견한 동갑내기 23살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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