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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 Jul 21. 2023

꽤나 실용적인 죽음의 쓸모

자취방을 집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순간

{EP7}


우여곡절 끝에 서울 한복판에 마련한 25만 원짜리 나만의 공간. 처음 가져본 ‘자취방’은 생각보다 묘한 존재였다. 가족들이 없으니 집이라고 하기엔 휑하고, 그렇다고 집이 아니라기엔 나의 일과 중 대부분을 보내는 공간이었다. 선뜻 집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화 중에도 의식적으로  ‘집’보다는 ‘자취방’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사실 월세방이 '집'이라기엔 이것저것 부족한 것들이 많았다. 부엌과 안방이 나눠어있긴 하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 효율적인 이사를 하기 위하여 최소한의 인테리어만 해두었다. 앉은뱅이 식탁 겸 책상과 매트리스, 선반, 좌식 화장대가 안방 내용물 전부다. 죄다 좌식 가구에다가 제대로 된 책상도 없다 보니, 그냥 부엌과 자는 방뿐인. 그러니까 물리적으로도 집보다는 잠만 자는 기숙사 느낌에 가까웠다. 한동안은 뭐랄까 집이 없는 홈리스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렇게 서로 낯을 가리던 사이였던 자취방을 ‘집’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Too good to say goodbye.


자취 생활을 시작한 지 8개월쯤 되었을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다행인 건 갑작스런 죽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1년여간의 투병 기간이 있었기에 짧더라도 작별의 시간이 있긴 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작별을 한지는 모르겠다. 아마 시간이 더 길었다 해도 제대로 된 작별은 분명 못했을 것이다. 나의 세상을 구성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존재가 사라지는 건 처음 해본 경험이니까. 존재는 사라졌어도 그가 만들어주었던 세상은 그대로다. 그렇다 보니 완전한 작별이라는 건 영영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죽음은 현실이었다. 드라마에서처럼 ‘병실’에서 ‘장례식장’으로 화면 전환 따위 되지 않는다. 병실에 돌아가신 아빠가 누워있는데, 나는 슬퍼할 겨를도 없이 원무과에 수납하고 사망신고서를 여러 장 떼고 회사에 부친상을 알려 장례 서비스를 신청하고 여기저기 전화를 돌렸다. 이런 정신없는 와중에 아빠가 태어난 고향인 도봉동과 가까운 곳에서 보내드리고 싶은 맘에 서울 시립 장례식장을 선택했다. 장녀로서 처리해야 행정 업무가 넘쳐났고 감정을 추스를 여유 따위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장례식장은 장사치 투성이었다. 예약한 식장에 들어서자, 까만 옷을 입은 직원은 두툼한 메뉴판을 들고서 유족들이 선택해야 할 것들을 쭈욱 보여줬다. 꽃장식, 음식 메뉴, 액자, 수의... 품목도 참 다양했다. 돌아가시고 나서 좋은 걸 해드리는 건 불효자들이나 하는 짓이랬다. 이 말에 매우 공감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평범 그 이상의 것은 계약할 생각이 없었다. 가장 낮은 단계의 꽃장식을 하겠는 내게, 직원은 이게 실제로 보면 엄청 작고 초라하다며 절대 안 된다고 만류했다. (이렇게 선택을 종용할 거면 왜 굳이 물어보는지 모르겠다) 사람들이 많이 한다는 프리미엄 꽃 장식을 영업하는 걸 겨우 뿌리치고 베이식으로 계약했다. (대충 '그걸로 할게요~'라고 하기엔 30만 원이나 차이 났다. 그 돈으로 효도나 하지. 물론 이젠 내가 잘 사는 게 효도겠지만)


한숨 돌리고 있는데 험악한 인상의 아저씨가 오더니 냉장고에 있는 과일 쓸 거냐고 물었다.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과 드문드문 갈색으로 멍든 오렌지의 상태를 보고 안 쓸 거라고 대답했더니, 냉장고 문에 자물쇠를 걸어 잡으며 만약 외부에서 과일을 반입하면 벌금을 내야 할 거라고 으름장을 두고 갔다. 잠시 쫄았지만, 007 비밀 작전 뺨치는 수법으로 근처 홈플러스에 가서 신선하고 질 좋은 제철 과일을 공수해 와 손님들께 대접했다.


온갖 장사치들 사이에서 정신은 오히려 온전해졌다. 유족이 아니라 이 이벤트를 어떻게든 잘 끝내야 한다는 일종의 플래너 같은 마음가짐이었다. 와줘서 고마운 사람들에게도, 그리고 아마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 될 사람들에게도 위로를 받았지만 모두 튕겨 나갔다. 머리는 아직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태를 파악 중이었다. 정신없이 흘러가는 데로 나도 흘러가고만 있었다.




카를로는 내 소식을 듣자마자 말없이 입사 후 일 년 동안 한 번도 쓴 적 없던 연차를 3일 연속으로 사용했다.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순간부터 끝까지 옆에 있어주었다. 식장 안 휴게실에서 나와 가족들이 잠을 청할 동안, 카를로는 테이블이 놓인 식당 한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잠에 들었다.


나는 카를로가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일까지 시키자니 미안해서 얼굴을 볼 때마다 마냥 쉬라고 말했다. 그런데 카를로 입장에서는 도와주러 온 건데 자꾸 쉬라고만 하니까 본인이 필요 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나 보다. 오해가 커져서 감정이 격해진 나는 그만 뾰족한 말을 뱉어버렸고, 그는 집으로 돌아가려고 열 걸음쯤 걷다가 다시 내 곁으로 돌아와 이런 말을 했다.


‘난 여기 너 도와주러 온 거야. 가고 싶어도 못 가. 너 걱정돼서 절대 못 가.’


 이 날 이후 우리는 식구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자취방을 집이라고 부르게 된 순간


더 쉬면 일상으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을 것 같아서 일부로 휴가를 더 쓰지 않고 다음날 회사에 나가기로 했다. 엄마와 동생의 배웅을 받고 다시 성수 자취방에 발을 들였다. 내 옆엔 카를로도 함께였다.


마치 어디 놀러 나갔다가 집에 돌아올 때처럼, 평범한 귀가였다. 성수역 3번 출구에서 내려 따릉이를 타고 자취방에 도착했다. 알록달록한 잠옷으로 갈아입고 익숙한 이불 위에 앉자 온갖 드라마 같은 상황이 있었던 3일 만에 느끼는 안도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온전히 '나'일수 있는 공간에 당도했다는 안도감. 그제야 감정의 세세한 결이 느껴졌다. 나를 가장 먼저 덮친 것은 후회였다. 세모나게 생긴 후회들이 뾰족한 날을 세우고 나에게 몰려왔다.

하지 말아야 했던 나쁜 생각들
참았어야 했던 뾰족한 말들
다시 한번 기회를 준다면 다르게 행동하고픈 순간들

그럼에도 행복했던 장면들
내 곁을 지켜준 이들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남겨진 약속들

처음엔 후회되는 것들만 잔뜩 떠오르더니, 마지막에는 미안한 마음, 고마운 마음, 행복했던 기억들이 몽글몽글 떠올랐다. 이불 위에 앉아 카를로를 앞에 두고 꺼이꺼이 삼켜 놓았던 울음을 뱉었다.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숨 넘어갈 듯 울어버렸다. 나에게 새로운 집이 생긴 순간임을 느낄 수 있었다.




죽음은 꽤나 실용적이다. 나는 장례식장에서 가져온 살림살이로 삶을 꾸렸다. 장례식장에서 가져온 과도로 참외를 깎아 먹고, 장례식장에서 가져온 삼선슬리퍼를 회사 사무실에서 신고 돈을 번다. 죽음은 나의 살이 되고 피가 되었다. 


삶은 끝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의미를 갖는다. 죽음은 타인의 것만이 아니다. 인간에게 공평한 단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죽음일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미지의 죽음을 꼭꼭 씹어 소화시켜 나의 것으로 만들어 두어야 한다.


시련을 맞은 나무의 가지가 꺾이면 거기에서 더 두꺼운 가지가 돋아난다고 한다. 나도 새로운 집에 뿌리를 단단히 내려 두꺼운 가지를 내놓을 참이다.





ps.

죽음을 기억한다고,

메멘토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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