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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 Jul 14. 2023

나의 밥을 뺏어먹는 남자

내가 먹던 밥을 먹는 그에게서 설렘을 느꼈다

{EP.6}

카를로


나의 서울살이를 이야기하면서 나의 연인 '카를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나를 성수동으로 이끈 장본인이자 일상을 함께하는 파트너이다. 아직 우리 관계엔 결혼이라든가 하는 거창한 라벨은 없지만, 서로 삶의 동반자가 되어가고 있다. 


카를로의 본명은 강카를로이다. 

물론 거짓말이다. 


카를로는 한국인이다. '강'으로 시작하는 매우 한국적인 이름도 가지고 있다. 카를로는 내가 그를 부르는 일종의 애칭인데 내가 지은 것은 아니고 과거의 그가 지어놓았던 것을 내가 발굴해 냈다고 볼 수 있다. 


초등학생이었던 그는 갑자기 친구들에게 '사실 나는 아프리카 남아공 태생이며, 본명은 강까를로'임을 고백했다. 친구들은 믿지 않았지만, 강까를로는 계속 주장했다. 어느 날 학교 앞에서 엄마를 마주친 강까를로,  뻔뻔하게도 '엄마! 나 진짜 아프리카에서 태어났지! 내 이름 강까를로지?'라고 외쳤고, 어머니는 '맞아. 너 강까를로잖아'라고 대답해 주셨다. 그때부터 친구들이 진짜 믿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런 위트 있고 건강한 농담이라니! 나는 이 에피소드를 듣고 난 뒤 그를 더 애정하게 되었으며 종종 그를 카를로라고 부르게 되었다. 하지만 이 한 토막의 이야기만으로 카를로를 소개하기는 부족하니, '남자친구의 어디가 좋아서 만나는 거냐'는 류의 질문을 받을 때 내가 항상 하는 스토리텔링을 들려주겠다.

솔과 카를로, 같이 청계천 다리 위에 서있다. 
솔, 초고층 아파트(예를 들면 시그니엘)를 보며 신세 한탄을 하거나, 백만 유튜버가 되어 불로소득이 꽂히면 좋겠다는 현실성 없는 상상을 하며 왠지 울적해지고 있다.
카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청계천을 쳐다보고 있다.
'솔 이것 봐 물고기 짱 많아'

내가 헬륨가스 풍선을 손에 꼭 쥐고선 닿지 못할 미래와 갖지 않아도 될 자괴감으로 현실과 멀어질 때 나를 육지로 끌어내려주는 존재랄까.



나의 밥을 뺏어 먹는 남자


카를로를 만난 곳은 제주도였다. 서쪽의 한적한 게스트하우스에서 스텝으로 일하던 스물넷과 스물셋이 눈을 맞은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가려던 계획이 무산되어 청춘을 즐기기 위한 차선책으로 제주도를 향한 스물넷 솔, 그리고 군대 전역 후 쉬기 위해서 제주도를 향한 스물셋 카를로였다. 마치 노비들끼리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같이 힘든 일을 함께 하다 보면 사랑에 빠지게 된다고들 하던데. 아쉽게도 그가 이성적으로 신경 쓰이기 시작한 계기는 다름 아닌 '식사' 때문이었다.

우리는 게하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가로 의식주를 제공받았는데, 그중 식(喰)이 퍽 괜찮았다. 식당 경영 경력이 있는 매니저가 매 점심마다 맛있는 식사를 제공해 주었다. 게스트하우스가 식당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메뉴는 다채로웠다. 주로 흰쌀밥을 베이스로 메인 메뉴 하나를 곁들이는 식의 구성이었다. 마늘 향이 일품인 짜장밥, 사골국에 순대를 넣어 만든 순댓국, 식당에서 파는 맛의 김치찌개, 딱새우 2 마리만으로 바다향 가득한 라면, 파기름으로 볶은 제육... 한마디로 밥도둑이 따로 없는 식단이었다. 


그즈음의 나는 식단에 엄격한 사람이었는데, 밥 한 공기를 다 먹는 일이 드물었다. 필라테스를 시작하며 식사량을 반으로 줄였기 때문이다. 밥공기를 받으면 숟가락으로 가운데를 주욱 그어서 반으로 나누고 딱 그만큼만 먹었다. 배가 찼다면 가차 없이 버렸다. 그때는 음식 아까운 줄도 몰랐다. (물론 지금은 음식 남기는 걸 가장 싫어한다.)


이런 나의 밥을 탐내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지금 나의 연인이 된 카를로였다. 한창때인 이십 대 남성답게 카를로는 밥을 참 많이 먹었다. 주변에 남자 친척도, 남자사람친구도 없어서, 혈기왕성한 남자와 생활해 본 것이 거의 처음이었던 내게 그 모습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처음 알았다. 남자들은 밥을 저렇게 많이 먹는구나. 나와 다른 소화기관을 가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모든 남자 스텝들은 매일 황소밥을 먹었다. 개중 가장 맛있게 먹는 이는 단연 카를로였다. 그는 깔끔하면서 동시에 먹음직스럽게 식사를 했다. 여기서 깔끔이란 식사 예절을 의미한다. 쩝쩝대지도 않고 입에 음식물이 담긴 채 말하지 않으며, 젓가락으로 반찬을 휘적이지 않는, 그런 기본 식사 예절말이다. 


어느 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식사를 마친 그의 시선에 내 밥그릇이 걸렸다. 마늘향이 향긋한 짜장소스가 아주 살짝 묻은 밥 반공기가.


그는 조금 더 먹고 싶은 눈치였다. 아쉽게도 남은 밥은 모두 품절 상태. 하지만 선뜻 내 것을 먹으라고 말할 수 없었다. 내가 살아온 세상에서는, 남에게 내가 먹던 걸 먹으라고 권하는 건 실례가 되는 행동이었다. 상대가 지저분하고 더럽다고도 느낄 수 있는 일이니까. 그래서 밥을 더 먹고 싶어 하는 그의 눈빛을 무시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지긋이 내 밥그릇을 향했다.


- 안 먹어? 안 먹으면 내가 먹어도 돼?


 이 말을 들었을 때 느꼈던 황당함과 당황스러움을 아직도 기억한다.


- 내 밥을? 네가? (?!?!?)


안될 이유는 없겠지만, 나였다면 먹지 않았을 것이다. 남이 남긴 밥을 먹는 건 ‘좀 그러니까.’ 허나 그는 그런 거 상관하지 않았다. 그저 본능에 충실했고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게 내 밥을 가져가 맛있게 먹었다. 일련의 상황은 무안함에 몇 마디 더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매우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그날 이후 내 밥 반공기는 온전히 카를로 몫이 되었다. 내가 먹던 밥을 더러워하지 않고 잘 먹는 그에게서 왠지 모를 설렘을 느꼈다.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자연스러움에 매력을 느꼈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카를로는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인간이었다. 대화를 할 때면 쑥스러울 수도 있는 자신의 감정이나 상황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상대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욕심은 단 1그램도 없었다. 우산을 빌린 뒤 몇 주 동안 돌려주지 않아도 재촉하지 않았다. 카페에 가서 내가 시킨 아인슈페너가 맛없다고 하면 조용히 자신의 청귤에이드와 바꿔주었다. 같이 걷다가 신발끈이 풀리면 가만히 멈추어 묶을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그런 그의 자연스러움을 떠올린 뒤, 남이 남긴 음식을 먹는 나, 혹은 내가 남긴 음식을 먹는 사람. 무엇 때문에 이상하게 느꼈을까 생각해 보았다. 양이 부족하면 남의 밥이라도 좀 더 먹으면 되지, 소스 묻은 부분이야 치우고 먹으면 되지. 사실 그게 그렇게 더러운 행위도 아니다. 가장 문제는 남긴 걸 먹는 나를 보는 남의 시선이었던 것 같다. 남이 남긴 걸 먹는 모습을 남에게 보이기 싫었다. 미련하고 식탐 있어 보이고 구질구질해 보일 것 같았다.



9살이던 여름의 어느 날 밤, 반주를 걸쳐 얼굴이 빨개진 아버지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이런 이야기를 한 적 있다. 


- 만약에 아빠가 밥에 침을 뱉어서 먹는다면 더러울 것 같니?


어린이들이 더러운 단어를 좋아한다고 했던가. 이 말을 들은 나와 동생은 ‘더러워’라고 하며 꺄르르 웃었다. 밥에 침을 왜 뱉어! 말도 안 되는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우리를 보고 아버지는 웃으시더니 이어서 말씀하셨다.


- 입에 들어가서 음식이랑 침이랑 섞이는 거나, 밥에 침을 묻혀서 먹는 거랑 똑같잖아.


띠용. 

맘 속에선 말도 안 되는 말이라고 반박하고팠지만, 반박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맞는 말이었다. 어쩌면 이때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굉장히 철학적인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더럽다고 생각하는 게, 사실 더럽지 않을 수 있다. 왜 더럽다고 생각하지? 모두 다 똑같은데. 모두 섞이는데. 결국은 모두 하나인데.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밥을 아무렇지 않게 가져가던 카를로가 가끔 떠오른다. 그리고 속으로  작게 웃음 짓는다. (금잔디를 본 구준표의 '뭐 저런 애가 다 있지?' 류의 웃음이다.) 어쩜 이렇게 나랑 반대일 수 있을까. 내가 그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에게서 나의 모습을 전혀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당연히 옳고 그르고 그렇다고 생각해 오던 것들을 다시 고민해보게 하는 사람. 어쩌면 변하고 싶었던 내가, 나를 구원해 줄 누군가를 본능적으로 알아본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부끄러움 많던 나는, 웬만하면 부끄러워하지 않는 그를 만났다. 웬만하면 자신을 투명하게 드러내버리는 그를 만났다. 그리고 숨기고 싶어 했던 것들을 조금씩 드러내는 연습하고 있다. 그렇게 점점 나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그건 우리가 너무 달라서 가능한 일이겠지. 다행인 건 우리, 입맛은 굉장히 잘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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