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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 Jun 23. 2023

25만 원짜리 월세방의 비밀

완벽한 방의 단 한 가지 흠,  바로 야외 화장실

{EP.4}


성수동에서 찾은

25만 원짜리 월세방의 비밀


두 달 넘게 자취방 매물을 찾으면서, 성수동은 한 번도 후보지에 올라온 적 없는 동네였다. 50억이 넘는 대장급 아파트로 유명하고 요새 일명 핫플로 이름값이 높은 만큼 내 예산에 맞는 집은 없을 것이 뻔했다. 그럼에도 성수동 매물을 검색해 보게 된 까닭은 ‘카를로’ 때문이었다. (카를로는 그의 초등학생 시절 별명이며, 순수 혈통 한국인이다. ) 그는 당시 만난 지 2년 된 나의 남자친구였는데, 그가 성수동에 직장을 얻게 된 것이다.


보증금 : 1,000만 원 이하
월세 : 40만 원 이하


택도 없는 조건을 필터로 걸어놓고 별 기대 없이 매물을 검색하던 어느 날, 눈이 휘둥그레질만한 매물을 발견했다.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가 단돈 25만 원인 방을 발견한 것이다. 서울에서 이만큼 저렴한 월세 매물을 본 것도 처음인데, 게다가 요새 가장 핫한 동네 성수라니.

성수동에 이 가격이라면 하자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집주인이 올려놓은 글을 다시 자세히 읽어보니 '시장에 위치했지만 조용함'이라고 적혀있었다. 상가 2층의 셋방이었던 것이다. 20대 여자가 살기에 그닥 적합해 보이진 않았지만. 그날따라 할 일이 없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카를로와 성수동을 향했다. 매물이 별로라면 성수에서 놀다 올 요량으로 가벼운 마음이었다.




성수역을 나서는데 에스컬레이터에서부터 최신 인기 브랜드의 포스터가 나를 반겼다. 그들이 타겟으로 하는 젊은이들이 성수에 얼마나 많이 오면 이렇게 곳곳에 광고가 덕지덕지할까. (광고와 매체의 적합성을 체크하는 것은 광고 회사 다니는 사람의 만성 직업병이다) 그도 그럴 것이 3번 출구 앞에는 친구를 기다리는 힙한 LOOK을 입은 이들로 바글거렸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이런 곳에 살면 너무 시끄럽겠는걸'


역에서 10분쯤 걸었을까. 월세방에 다가갈수록 페이드아웃처럼 사람들의 와글거림이 서서히 줄어들었다. 뚝도 시장 건물 위에 위치한 방이었다. 시장이라기엔 활기를 잃은 조용한 모습이었다. 조용히 나물을 다듬는 할머니와 비린내 나는 스티로폼 더미가 왠지 맘에 들었다.

시장에서 조금만 집중하면 이런 전단지를 찾아볼 수 있다.


집주인은 1층 상가 야식집의 사장 할아버지였다. 저녁 장사 준비가 한창이던 사장님은, 방 문이 열려있으니 마음대로 구경하고 나오라고 했다. 분명 수도 없이 와본 시장이란 공간인데, 상가 옆에 수상한 문이 하나 있다는 것을 이때 처음 알았다. 문을 열자 마치 해리포터 속 9와 4분의 3 승강장만큼이나 낯선 세상이 펼쳐졌다. 그곳엔 사람 사는 곳이 있었다. 아쉽게도 냄새까지 동화 같진 않았다. 그 숨겨진 공간에서는 오래된 음식점 특유의 쩐내가 났다. 살짝 숨을 참고 가파른 시멘트 계단을 올랐다. 이윽고 월세방에 도착했다.


방은 기대보다 훨-씬 더 좋았다. 현관문을 여니 세로로 긴 직사각형의 부엌이 나왔다. 과장 조금 보태 이불 깔고 잘 수도 있을 만큼 널찍한 2평 남짓의 부엌은 초보 자취생의 가슴을 뛰게 했다. 이렇게 넓은 부엌을 가진 셋방을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세수할 수 있을 만큼 넓은 싱크대도 있었다. 강남 신축 오피스텔 원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넓은 부엌이었다.


'이렇게 넓은 주방에 안방이 따로 있다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낮은 문턱 위에 문이 하나 있었다.

계단만 한 문턱을 넘으니 8평 정도 되는 정사각형의 안방이 나왔다. 마찬가지로 이렇게 넓은 방을 본 적 없었다. 안방 하나가 신림동에서 봤던 초소형 원룸을 통째로 합친 것보다도 넓었다. 퀸사이즈 침대를 놓고 책상을 놓고 행거를 놓아도 공간이 남을 것 같았다. 장판과 벽지는 새로 도배를 한 듯 새하얗고 반짝거렸다. 비록 집주인이 셀프로 한 듯 약간 뜨고 허접한 부분이 있었지만, 이것으로 충분했다.


이런 완벽한 방에는 단 한 가지 흠이 있었다.

바로 화장실이 밖에 있다는 점이었다.



완벽한 성수 월세방에

딱 한 가지 없는 것


아아, 크리티컬한 문제였다.


분명 21세기에 집을 구할 때 고려해 볼 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예상 밖 문제에 입이 딱 벌어졌다. 예전에, 그러니까 검정 고무신 시절에는 화장실이 모두 집 밖에 있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그걸 내 눈으로 보게 되다니.


그 건물에 있는 셋방 모두 화장실이 내부에 있는데, 딱 내가 보러 간 방만 화장실이 밖에 있다고 했다. 현관문에서 나와서 세 걸음 걸으면 화장실 문이 나온다. 신은 공평하다고 했던가. 애석하게도 화장실은 넓었다. 욕조를 놔도 될 사이즈였다. 물론 욕조는 없었다. 세면대도 없다. 그래도 넓은 것이 어디인가? 현관을 나서야 한다는 단점만 뺀다면, 원룸에 꾸역꾸역 들어간 좁디좁은 화장실 보다야 훨씬 나았다. 전 세입자가 두고 간 통돌이 세탁기가 있다는 것도 플러스 요소였다.


진짜 딱 한 가지 단점. 화장실이 밖에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장점이 훨씬 많았다. 아니 사실 그것만 빼면 완벽한 방이었다. 


말도 안 되게 저렴한 월세와 보증금, 

놀러 가기에도 돈 벌러 회사 가기에도 완벽한 위치,

한강까지 3분 거리, 

분리된 것으로 모자라 심지어 넓다고 느껴지는 부엌과 안방 크기, 

강남에 있는 회사까지 30분 컷.


상가 건물이어도 있을 건 다 있었다. 심지어 남산타워가 보일 정도로 탁 트인 뷰가 펼쳐지는 옥상까지 있었다. 게다가 돈이 오고 가는 시장이다 보니 보안이 철저한 편이었다. 곳곳에 CCTV가 설치되어 있었고 관리원이 밤늦게까지 순찰을 돌았다. 파출소도 매우 가까이 있었다. 심지어 곳곳엔 전 세입자분이 두고 간 세간살이들이 있었다. 가스레인지, 세탁기, 에어컨, 냉장고까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집 밖에 화장실’은 치명적인 문제였나 보다. 이 월세방은 다른 셋방보다 5만 원가량 저렴했고, 부동산 공고가 올라온 지도 2주가 지난 상태였다.




집을 둘러보고 나서 심란해졌다. 카를로와 함께 스트레스를 없애준다는 의미의 '유스트레스'라는 이름을 가진 카페에 가서 아이스 모카를 들이키며 머리를 맞대고 이 방의 장점과 단점을  고민했다.


Pros(장점)
주거비를 아껴서 돈을 많이 모을 수 있을 거야.
차라리 몸테크해서 얼른 내 집 마련하는 게 낫지 않나?
오히려 시장 안에 있어서 보안이 철저할지도 몰라.
이만한 가격, 평수, 위치의 방 구할 수 없다는 거 너무 잘 알아.

Cons(단점)
화장실이 집 밖에 있으면 위험하진 않을까?
추운 겨울엔 씻고 나올 때 진짜 귀찮겠다.
밤에 화장실 갈 때 너무 무서울 것 같아.
친구들 데려오기가 쉽지 않겠다.


온갖 장단점을 나열하던 나의 결론은, ‘계약한다’였다.



집주인 할아버지는 손님이 한적해지는 오후 10시 이후에 방문해 달라고 했다. 얼음이 녹아 물도 커피도 아닌 정체불명의 액체를 쪽쪽 거리던 나는 영업시간이 끝날 때쯤 야식집으로 향했다. 군침 나는 매운 냄새가 가득한 식당 의자에 앉았다. 집주인이 계약서 양식을 들고 왔다. 보증금 500에 25. 사인을 하고 보증금을 바로 입금했다. 이 정도 적은 보증금이라면 떼어먹힐 걱정도 없고, 만에 하나 떼어 먹힌다 해도 아주 큰 타격은 없을 것이다. 


선선하던 9월 1일,

드디어 25만 원짜리 서울 살이가 시작되었다.







*개인 정보 보호를 위한 이미지 수정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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