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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 Jun 07. 2023

구집자, 서울에서 집을 구하는 자

 한 번도 되어본 적 없는 상태의 인간, 일명 '구집자'

{EP 2.}


서울에,

집이라는 목적 만들기


경기도인인 나에게 서울은 언제나 목적이 있는 공간이었다. 학교를 다니기 위해, 대외활동에 참여하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혹은 놀기 위해. 그러니까, 서울 생활 5년 동안 ‘목적’이 없는 서울 방문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목적이 없어도 집이라는 이유만으로 마음이 편한 공간을 만들어야 하다니, 지역을 고르는 것부터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강남과 출퇴근이 용이한 지역이 생각보다 다양하다는 것이었다. 일명 ‘강남 액세스가 용이한 주거 지역’은 크게 세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한강의 남쪽에 위치한 지역이다. 남부터미널이나, 신림, 사당 같은 동네인데, 인구 밀집도가 높긴 하지만, 강을 건널 필요가 없다는 이점이 있다. 주로 오피스텔 물건이 많은 편이었다. 그다음은 한강 북단에 위치한 지역이다. 아마 이 지역에 가장 많은 선택지가 존재할 것이다. 옥수에서 금호, 약수로 이어지는 동네와 이태원, 광진구가 대표적이다. 지옥철을 견딜 수 있다면, 3호선이나 7호선과 인접한 동네까지도 범위를 확장할 수 있다. 군자, 노원, 충무로, 은평구 정도가 되겠다. 마지막은 경기도 남부 지역이다. 신분당선을 탄다면 강남까지 40분 조금 넘게 걸리지만, 완전한 주거 지역이어서 살기 좋다는 장점이 분명한 동네다. (아직은 아침에 더 자고 회사 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싱글인 터라, 경기 남부는 고려하지 않았다.)



집다운 집을 만드는

최소한의 기준


그닥 까다로운 기준을 세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딱 세 가지만 할 수 있는 집이길 바랐다.

'먹고, 자고, 쉬기'

이 세 가지가 가능케 하는 최소한의 기준은 아래와 같았다.


✓ 1억 초반 전세
✓ 강남 출퇴근이 용이할 것 (30분 내외)
✓ 안방과 부엌의 분리되어 있을 것(절대 양보할 수 없는 최우선 조건)
✓ 창문 있을 것
✓ 방에서 세 걸음 이상 걸을 수 있을 것


돈도 없는 사회 초년생 주제에, 너무 많은 것을 바랐던 것일까? 최대한 이상과 로망은 쏙 빼놓고,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한 기준만 세웠다고 생각했는데. '먹고, 자고, 쉬기'를 문제없이 해낼 수 있는 집을 찾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위치가 좋으면 곰팡내가 진동했고, 예산이 맞으면 방 크기가 웬만한 카페 화장실만 했다. 집을 보러 다니면서 내가 세워두었던 소박한 기준들은 너무나 쉽게 대체되거나 지워졌다. 예를 들어, '나무가 보이는 창문이 있을 것'이라는 나의 낭만 섞인 기준이, 곧 '바람 통하는 창문 하나라도 있을 것' 정도 하위호환되어 대체되는 식이었다.  



구집자로 보낸 한 달


여름이 시작되던 유월, 호기롭게 서울로 나섰다. 그간 학생, 구직자, 직장인으로서 서울을 밟았다면, 이번엔 내가 한 번도 되어본 적 없는 상태의 인간, 일명 '구집자'로서의 첫 발자국이었다. (*집을 구하는 자)


서울의 달동네를 오르다  만난 하늘


한남동
한남동이 부자 동네라는 사실을 노래 가사를 통해 알게 되었다. 뮤지션들은 한남동 유엔빌리지가 종교라도 되는 양 외쳐댔다. 한 유명 아이돌은 타이틀 곡 제목 자체가 유엔빌리지이기도 했다. 또 다른 고-급 아파트 한남 더 힐은 인터넷 밈을 통해 알게 되었다. '500원이 부족해서 한남더힐을 못 샀다'는 식의 자조 섞인 유머였다.


나는 부자가 아니기 때문에, 한남동과는 낯을 가리는 상태였다. 자격지심으로 인한 내적 거리감 때문에, 한남동은 딱 두 번밖에 가보지 않다. 그리고 이번 여름, 1억 3천 짜리 전셋집 매물을 보기 위해 세 번째로 방문했다. 어쩌면 괜찮은 가격으로 부촌의 인프라를 즐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설레었던 것이 사실이다.


집의 구조와 평수 자체는 좋았다. 부엌과 안방이 분리되어 있었으며, 위치도 유엔빌리지와 근접해 있었다. 치안 걱정은 없을 것 같았다. 딱 한 가지만 빼면 완벽했다. 바로 들어가자마자 코를 찌르는 치명적이고 눅눅한 곰팡이 냄새였다. 큰 창문이 나있는 방이었지만, 창 밖으로 보이는 건 바짝 붙은 옆건물의 벽돌이었다. 해가 비칠 리 만무하고, 바람이라곤 통하지 않는 집이었던 것이다. 이 축축하고 기분 나쁜 냄새가, 내가 가진 얼마 되지 않는 물건들은 물론이고, 피부까지도 벨 것만 같았다. 패스.

서빙고
종종 이태원에도 내 예산과 맞는 집이 나왔지만, 살인적인 높이의 계단과 언덕에 무릎도가니가 남아날 것 같지 않아 포기했더랬다. 오히려 나의 예산과 맞는 집은 이태원 아래쪽에 위치한 서빙고 쪽에 있었다.


이태원의 살벌한 계단


1억 2천 짜리 반지하 집은, 4인 가족이 10년 동안 살았다고 해서 더 정이 갔다. 반지하지만 지층이라고 볼 수 있는 높이였고, 해가 잘 들어 보송했다. 너른 방이 두 개였고, 자전거를 타고 반포대교만 건너면 강남이었다. 서빙고 특유의 소박한 정취도 맘에 들었다. 정감 있는 오래된 구멍가게가 있고, 나이 드신 분들이 많아 조용하고 평화로운 동네였다.


서빙고에는 아기자기한 벽화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런데 내가 만난 중개 업자 A가 다른 중개 업자 B보다 천만 원을 더 불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른 중개업자 B에게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내가 만난 중개 업자 A는 1억 2천에 도배를 전부 다시 해주기로 했는데, 다른 중개 업자 B는 1억 1천에 '도배 없이'가 조건이었다. B는 바로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해 주었는데, 1억 1천에 '도배 없이'가 맞다고 했다. 중개업자가 임의로 천만 원을 더 부른 것의 뒤가 너무 구렸다. 뒤 돌아보지 않고 패스.
 
사당

2호선, 4호선, 조금만 더 걸으면 7호선까지 껴안고 있어 자취생들의 성지라 불리는 사당. 퇴근 후 저녁을 거르고 사당으로 향했다. 전신에 오피스텔이었다. 관리비만 10만 원이 훌쩍 넘는 오피스텔에서 살 생각은 없었지만,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함께 입사한 회사 동기들이 오피스텔 위주로 알아보길래 한번 구경이나 해보자는 마음으로 찾아갔더랬다.


예산은 1억 초반이라고 분명 얘기했건만, 내 또래의 젊은 중개 업자는 자꾸만 '사람답게 살려면 2억 정도는 되어야 한다'며 영업했다. 하지만 난 대충 한 귀로 흘렸다. 그 사람이 아니라, 내가 살 집이기 때문이다. 굴하지 않고 저렴한 매물만 보여 달라고 했다.


이 동네에서 가장 절절한 '현실 자각 타임'을 보냈다. 오피스텔의 겉모습은 아주 멋졌다. 지금까지 봐왔던 빌라와는 확실히 다른 맛이 있었다. 확실히 깔끔했고, 엘리베이터까지 있었다. 하지만 내부의 실상은 달랐다. 고시원처럼 다닥다닥 붙은 현관문들, 그 안엔 침대 하나 놓으면 다른 짐을 둘 곳이 없을 정도로 좁은 고시원 수준의 방이 있었다. 분명 1.5룸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그냥 부엌에 허접한 미닫이문 하나 달아놓았을 뿐이었다. 풀옵션이라고 자랑하던 냉장고는 호텔에 들어가는 미니 냉장고였다. 말문을 잃었다. (그래놓고 관리비만 13만 원을 받았다) 7호선을 타고 배고픈 줄도 모른 채 집으로 돌아가면서, 나의 멀디 먼 집을 원망했다.


동대입구

3호선이 위치한 동대입구도 후보였다. 몰랐는데, 서울엔 부자 동네가 참 많았다. 그러니까, 조용하고 살기 좋다 싶으면 웬만해서 부자동네였다. 내가 만난 중년의 부동산 업자는, 이 동네가 부자들이 사는 동네라고 귀띔해 주었다. 부자라는 단어에 혹한 것은 사실이다. 조용한 동네 분위기가, 마치 부자들의 품위를 말해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부자 동네라는 단어가 갖는 힘은 꽤 큰 것 같다. 사실은 상상과는 다르겠지만, 현혹되기 쉽다.


일몰이 아름답게 지는 충무로 뒷골목의 전세 8천 짜리 물건이었다. 원룸이었지만, 적어도 창은 크게 나있었으며, 무려 엘리베이터도 있었다. 중기청 대출은 불가능했지만 집주인아저씨도 해당 건물에 함께 살고 있어, 전세금 떼어먹힐 걱정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왠지 건물 앞에서 팬티인지 반바지인지 모를 짧은 차림으로 담배를 뻑뻑 피는 주인아저씨의 인상이 좋지 않았다. 패스.


약수

약수에 산다면 지하철로 7분 만에 회사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옥수에서 약수로 이어지는 동네는 부동산에 무지한 내가 봐도 살기 좋은 동네였다. 넓은 초등학교가 풍기는 특유의 평화로움이 있었고, 금호시장에 먹자골목까지 먹거리와 유흥거리도 풍부하며, 한강과 가깝다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인지 이 주변 매물은 거의 씨가 마른 상태였다.


매물 자체가 가뭄에 콩 나듯 하니 1억짜리 전세방이 올라왔길래 냉큼 약수로 향했다.


느낌은 좋았던 약수동


약수역에서 내리자마자 사나운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났다. 내가 보러 간 매물은 언덕 한참 위에 있어서 차근차근 골목길을 올라가는데, 이상하게 사이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었다. 결국 나의 경로는 소음의 근원지까지 지나가게 되었다. 남의 가정사 궁금해하면 안 되지만, 내가 살게 될 동네일지도 모른다는 맘에 멀리서 쓱 엿들어보니, 가정 폭력으로 아버지가 집에 불을 지른다고 소동을 피워 경찰이 출동한 것으로 보였다.


이 정도면 이 동네는 살지 말라고 조상신이 알려주는 정도 아닌가. 다행히 집 상태도 끔찍했다. 패스.



구집자로 바라본 서울


'구집자'로서 돌아본 서울의 집들은, 서울에 있다는 지리적 이점을 제외하고는, 수중에 없는 돈을 대출까지 받아가면서 살만큼 가치 있는 곳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직장 문제만 아니라면, 지방 지역으로 이사라도 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1억 원은 분명 적은 돈이 아니다. 월급에 손도 대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최소 3-5년은 모아야 하는 금액이다. 하지만 서울을 돌아다니며 구집 활동을 해보니 턱 없이 부족하고 적은 돈으로 느껴졌다. 당장 내 수중에도 없는 금액의 돈이면서도 감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몇 년이 걸려 1억 원을 모은다고 해도, 주거에 있어서는 별 다른 도리없이 다시 을이 될 것이 뻔했다. 도배도 새로 해주지 않는 집주인의 여유가 부러웠고, 남의 집을 기웃거리는 나의 처지가 비루했다. 문득 내가 가진 것, 그 이상의 것을 탐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내 맘도 모르고 서울 하늘은 오늘도 맑다





다음 편 미리 보기

덜컥 계약금 백만 원을 내고 옥수동 전세방에 계약을 하게 되는데, HUG에서는 보증보험 가입이 어렵다고 한다. 생애 십만 원도 한번 허투루 써본 적 없던 나는, 계약금을 꼭 돌려받아야겠다고 다짐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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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된 모든 물건의 상태는, 낮은 예산대에 맞춰 방문했던 특정 물건의 상태일 뿐, 해당 지역의 다른 물건까지 일컫는 것은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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