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은 팩트가 아니라 감정이 이겼다.
{EP.3}
금전적 여유가 있어서 전세를 선택한 건 아니었다. 내가 가진 돈은 전세 보증금을 충당하기에 한참 모자랐지만, 중소기업 청년 대출*로 충당할 요량이었다. (중소・중견 기업 청년 재직자를 위해 연 1.2%대 낮은 이율로 대출해 주는 제도 참고)
집값이 폭등한 2021년, 1억은 서울에서 전세를 구하기에 턱 없이 낮은 금액이었다. 하지만 수중에 없는 돈이기 때문에 분에 넘치는 금액으로 느껴졌다. 그렇기에 굳이 여기저기 손을 벌려 예산을 높일 생각은 전혀 없었다.
부동산을 전전하는 내내 나의 분수를 넘는 일을 벌인다는 쎄한 느낌이 있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전세는 남들 다 하는 거잖아. 내가 소심해서, 통이 작아서, 토끼 심장이어서 그런 거야'라며 스스로를 다그쳤다. 결국 진짜 '내 집'을 갖기 위해서는 당장에 돈을 아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월세가 아닌 전세 계약만이 정답으로 느껴졌다.
한 달 만에 처음으로 계약이 성사되었다. 바로 약수역 도보 3분 거리에 위치한 1억 2천 짜리 물건이었다. 10평 남짓한 공간에, 방을 무려 3개로 쪼개 놓아서 구조는 별로였지만 가격 대비 나올 수 있는 최고 평수를 자랑하는 방이었다. 부동산 앱에서 해당 물건을 보자마자 가방을 둘러메고 약수동으로 달려갔다.
실물도 나쁘지 않았다. 방들이 좁아서 사용이 애매했지만, 원룸 보다야 곱절 나았다. 주변에 초등학교도 있어서 치안 걱정도 없었다. 창문은 비록 옆 건물 벽돌뷰였지만, 그 간격이 한 뼘 이상이어서 바람이 솔솔 들어왔다. 드디어 1억으로 인간답게 살만한 전셋집을 찾은 것이다.
방을 구경하고 있는 와중에도 중개업자에게 문의 전화가 걸려왔다. 하긴, 나도 한 달 동안 찾아 헤매도 이만한 가격에 이만한 집을 못 봤으니, 다른 사람들 눈에도 똑같이 좋아 보였을 것이다. 부동산은 발품을 많이 팔수록 좋은 매물을 찾을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간 서울의 다양한 집들을 보며 눈을 키웠고, 드디어 다른 사람들보다 한발 먼저 괜찮은 물건을 찾은 것 같아 가슴이 뛰었다.
중개업자의 구식 외제차를 타고 다시 부동산으로 이동했다. 깨끗한 등기부등본을 확인한 뒤 계약서를 작성하고, 우리 엄마 또래쯤 되는 집주인에게 가계약금 백만 원을 입금했다. 생판 모르는 남에게 덜컥 백만 원을 입금한다는 게 떨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나를 지켜줄 것만 같은 특약을 걸었기 때문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전세보증보험이 안 되거나
중기청 대출이 안 될 경우 가계약금을 돌려준다'
가계약을 마치고 대출 진행에 필요한 은행 서류를 준비하는데, 애써 눈길을 주지 않고 있던 불안이 다시 깨어났다. 명명백백 남의 돈으로 대출받아서, 내 분에 맞지 않는 가격의, 좋은 입지의 자취방에서 사는 것이 뭔가 어불성설처럼 느껴졌다. 그 뒤로 잡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큰돈을 보증금으로? 너무 위험한 거 아니야? 우리나라엔 전세 제도 없어.’
-태국 친구 왈-
‘누구누구 전세 사기 당했대. 보증보험 들었는데도 무용지물이래.’
-회사 동기 왈-
'전세는, 매매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좋은 집에서 살 수 있는 제도이지만, 전세를 떠돌다가는 집에 대한 눈만 높아진 상태이기 때문에 결국 집 매매하기 어려워질 수 있어요.'
-재테크 유튜버 왈-
외국에는 전세 제도가 없다는 사실도, 재테크 유튜버의 충고도 신경 쓰였지만, 나의 불안을 점화시킨 가장 센 불씨는 당시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하던 전세 사기였다. 자수성가하기 위해(자수성가라 하면 거창하고, 사실은 경제적으로 혼자 단단히 서기 위해서) 항상 버는 돈의 70% 이상을 저축하는 내가 전세 사기를 당한다면, ‘열심히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고 믿고 살았던 나의 과거, 현재, 미래 모두가 부정당하는 일이기 때문에, 다시 일어날 자신이 없었다.
천운인 걸까.
간략하게 말하자면, 해당 물건이 가진 모종의 이유로 은행에서는 중기청 대출이 어렵다는 답변을, HUG에서 보증보험 가입이 어려울 것 같다는 답변을 들었다. 삼촌 뻘의 남자 행원은 내게 ‘제 동생이 이 물건 가져왔으면 절대 반대했을 거예요’라는 조언까지 해주었다.
계약서에 특약을 넣었으니, 쉽게 돌려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부동산의 세계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부동산 중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오래 걸리지 않을 거란 생각에 통닭 포장을 주문해 두었는데, 정확히 76분에 걸친 장시간 통화가 되었고 하마터면 통닭 노쇼 도둑이 될 뻔했다.
나의 입장은 이러했다.
‘은행과 HUG에서 해당 물건은 중기청 대출과 보증보험 가입 진행이 안된다는 답변을 받았다. 계약금 돌려달라’
부동산 업자의 입장은 이러했다.
'내가 아는 ◦◦은행 ◇◇지점의 ▫︎▫︎행원에게 가면 진행될 거다. 내가 말한 은행 지점 가라.’
처음엔 객관적 팩트를 위주로 주장했다. '특약을 넣었고, 은행과 HUG에서 거절당했는데 왜 안 돌려주냐'는 식의 논리였다. 하지만 그는 계속 본인이 아는 행원이 있는 은행에 가면 된다며, 절대 돌려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해당 은행은 집과 회사에서 2시간 거리로, 바쁜 프로젝트에 투입된 입사 3개월 차 신입사원이 왕복하기에 불가능한 위치였다)
그즈음 회사 친구 한 명이 가계약금 백만 원을 날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 바닥에서는 계약금 몇백만 원 날리는 게 흔한 일임을 알게 되었다. 몇 번의 실갱이 끝에 더 이상 싸울 힘이 없어진 나는 백만 원을 잃은 사실을 어느 정도 받아들여야 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홧김에 적금을 다 깨버리고, 몇 백만 원씩 마구 써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기도 했다. 여름휴가 때도 20만 원 이상 써본 적 없는데. 그간 돈을 아끼기 위해 했던 노력이 억울해서 정수리의 뚜껑이 열릴 것만 같았다. 가장 싫은 것은 바보 같이 백만 원을 잃은 한심한 나 자신이었다.
자책의 늪을 허우적거리다가 엄마에게 SOS를 쳤다. 심리상담가로 일하고 계시는 엄마는 가끔 현답을 주시곤 한다. 무뚝뚝한 탓에 연락도 뜸하고 감정적 교류도 잘 되지 않는 첫째 딸의 SOS 요청에, 엄마는 엄마답게 다정한 답을 주었다.
이 세상에
돈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가
얼마나 많은데.
돈으로 해결되는 문제여서 다행이야.
아주 잠시, 백만 원을 통해 얻은 게 있다고 생각했다.백만 원이 아니라 내가 이런 일을 겪었을 때 위로해 주는 가족과 연인, 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집중하고자 애썼다. '나는 백만 원을 잃은 게 아니라, 나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주변 사람들의 소중함을 알게 된 거야.'
깨달음은 깨달음이고, 돈은 돈이다. 그러니까 깨달음과 돈은 별개의 것이란 이야기다. 마음은 감동받았지만 머리는 여전히 오십만 원이라도 돌려받고 싶어 했다. 그리하여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감정에 호소해 보기로 했다. 부동산 업자에게 뚱뚱하고 긴 MMS 문자를 보낸 것이다.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010-****-****
계약을 파기하기 되어 죄송합니다. 저도 정말 마음에 드는 집이어서 꼭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꼭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은행과 HUG에 상담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중기청 대출과 보증보험 모두 어렵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중략)
형편이 넉넉치 않아 학교 다니면서 4년 동안 아르바이트하고 인턴하면서 안 먹고 안 입고 모은 돈입니다. 월급의 절반 이상 적금에 넣고 있고, 부모님께는 아직 취업 턱도 내지 못했습니다. 백만 원이란 큰돈 써본 적 없는 인생입니다.
고생해 주신 거 압니다. 계약금 오십만 원이라도 보내주세요. 부탁드리겠습니다.
3단으로 문자를 구성했다.
(1) 계약 파기에 대한 미안함과 아쉬움 표현
(2) 특약 위반에 대한 팩트 나열
(3) 솔직한 나의 사정 이야기
내가 처한 솔직한 상황에 약간의 감정적 MSG를 뿌려 연민을 자극했다. 그의 반응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 돌려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에 답장을 볼 자신이 없었다. 오후 8시에 문자를 보내놓고는 다음날 점심시간까지 비행기 모드를 해놓았다.
아이스커피를 쥔 채 바들바들 떨면서 해제한 비행기 모드, 그리고 온 두 통의 문자.
난도질하는 심장을 부여잡고 핸드폰 화면에 초점을 맞췄다.
...
딱한 사정을 알겠으니 계좌번호를 알려달라는 답장이었다. 솔직함이 중요하구나. 감정의 힘이 가장 세구나. 단순한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일명 [가계약금 반환 사건] 이후 사실상 독립을 포기했다. 월세로 살자니 다달이 나가는 집세가 너무 아까웠다. 강남 출근이 용이한 월세 40만 원 이하 자취방, 적어도 사람이 서서 2걸음 이상 걸어 다닐만한 평수의 방, 부엌과 분리되어 있으면 베스트. 어려운 조건도 아닌데, 부합하는 집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가끔 심심풀이 땅콩으로 부동산 플랫폼에 들어가 검색 조건을 <보증금 1천만 원 이하>, <월세 40만 원 이하>로 설정해 놓고 셋방을 구경했다. 그러다 우연히 지도를 옮겨 성수동의 매물을 검색해 보게 되었다. 내 눈을 의심하는 가격의 월세방을 발견해다.
다음 편 미리 보기
월세 25만 원짜리 방엔 크나큰 애로사항이 있었다.
바로 화장실이 □□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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