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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 Jul 28. 2023

엄마가 요즘 들어 부쩍 많이 하는 말

엄마는 묵묵히 먹을 것으로 사랑을 표현했다

{EP8}


엄마가 요즘 들어 부쩍 많이 하는 두 가지 말이 있다
 
'먹을 사람도 없는데 많이 하던 게 습관이 돼서 자꾸 많이 하게 되네'

'이젠 요리도 너무 많이 하면 안 되겠어’


엄마는 서울에서 각자도생 하고 있는 두 딸이 본가에 갈 때마다 항상 상다리가 흐드러지게 상을 차려 놓는다. 그러고는 꼬옥 저 말을 덧붙인다. 그렇다고 진짜 음식을 적게 할 것도 아니면서 꼬옥 덧붙인다.


각자 자취방이 생긴 동생과 나는 이제 본가를 '엄마집'이라고 부른다. 괜찮은 반찬이나 국 하나만 있어도 잘 먹는 자취생인데, 엄마집에 가면 메인메뉴급 찬이 기본 두세 가지는 된다. 소고기 수육과 미역국을 한 끼에 다 먹는, 자취생이라면 상상도 못 할 그런 호사를 누린다. 만찬을 즐기면서 행복과 감사함에 젖어 황홀하다가도 엄마가 저 두 마디 말만 하면 기분이 팍 상하는 것이었다.


나는 엄마에게 '제발 같은 말 좀 반복하지 말라'며 애원한다. 엄마의 말은 내 맘속에서 자동으로 번역되어 '우리 가족이 4명일 때가 그립다'라고 들리기 때문이다. 아빠의 부재로 가족의 수가 달라졌음을 암시하는 동시에,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가부장녀*로서 듣고 있기 힘들다.

*필자가 만든 신조어, 가부장과 장녀의 합성어로 집 안에서 절대적 권력을 가진 장녀를 일컫는다.

하지만 이런 날 선 생각은 금방 소실된다. 가끔 엄마가 ‘성인이 된 지도 7년이 지났고, 엄마보다 무거운 듬직한 딸’을 아직 어린애처럼 대할 때면 금방 반성모드에 돌입하게 되는 것이다. 그건 바로 엄마가 과일을 깎아줄 때이다. 


엄마가 해주신 밥은 천 끼 이상은 먹어봤을 테니 엄마 밥을 먹는 건 아무렇지 않은데, 과일을 깎아줄 때면 항상 새삼스럽게 감사하다. 엄마는 딸들이 겅중한 청년이 된 지금까지도 모든 과일의 껍질을 다 까서 주신다. 수박은 늘 락앤락에 가지런히 빨간 속살만 담아서 내어주고, 참외는 씨를 긁어내고, 홍시는 겉에 얇은 껍질을 깎아주는 식이다. 유기농이라 껍질 채 먹어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늘 정성스레 과일을 깎아 예쁜 접시에 내어 주신다. 


밖에 나가서 혼자 살다 보니. 제철을 맞아 가격이 오른 과일을 냉장고에 들이는 것도 쉽지 않지만 그걸 예쁘게 깎아 먹는 건 더 어려운 일이란 걸 알게 됐다. 그런 탓에 딸내미는 아직까지 과일 깎는 법을 모른다. 무식하게도 감자 깎듯이 과일을 길게 세운 뒤 세로로 벅벅 칼질을 하며 껍질을 벗기다가, 살이 한가득 실려나갔다.(분명 큰 참외였는데 깎고 나니 세 조각뿐이었다)  과일에서 날파리가 생긴다는 것도 스스로 과일을 깎기 시작한 뒤부터 알게 되었다. 참외를 며칠 놔두었을 뿐인데 방 안을 돌아다니는 초파리가 늘어났다. 어디서 시작된 것인가 찾아보기 위해서 참외 쪽으로 갔다가 그곳에 애벌레 파티가 열린 것을 보고야 말았다(…) 집에선 구경도 못한 꼴이었다. 보이지 않았던 엄마 부엌의 수준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우리 엄마, 일명 송여사는 딸들 인생에 있어서 간섭하는 타입의 엄마는 아니었다. 고등학교 진학도 심지어는 대학 진학도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뒀다. 딸들 인생에 단 한마디 보태지 않았다. 엄마는 그저 '엄마의 엄마'가 그러했듯 묵묵히 먹을 것으로 사랑을 표현했다.


엄마 방식의 사랑은 딸들이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됐다. 딸들이 나가 살기 시작하니까 더 심해졌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잘해 먹인다. 그저 딸들에게 맛있는 걸 먹일 수 있다면 당신의 주말을 다 소비해도 아까워하지 않는. 영락없이 우리 외할머니랑 비슷해졌다.

우리 할머니

경상남도의 작은 시골마을, 산청에서 아홉 남매 중 첫째로 태어난 우리 진주할머니. 할머니는 아들 둘, 딸 하나를 낳고 살던 젊은 시절, 진주 같은 큰 도시로 이사 가는 것이 꿈이었다고 했다. 늘 책과 신문을 읽으시고 우리 엄마의 사십여 년 전 담임 선생님 성함도 기억하실 정도로 총명하신데 단지 딸이라는 이유로 학교 문턱도 밟지 못하셨다. 전업주부로 평생을 사셨다.


그런 할머니에게 음식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수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서울에서 진주까지 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할머니는 장어로 만든 추어탕을 쑤고 계셨다. 일흔이 넘으셨는데 아직까지 김치를 만들어 보내주신다. 심지어 서울에선 양파도 비싸지 않냐며, 진주서부시장에서 10kg짜리 양파를 사서 딸과 아들에게 나눠주신다. 가족들이 모여 식사를 할 때도 앉아 계시질 않는다. 같이 앉아서 밥 먹는 게 소원이라는 가족들의 만류에도 계속 다람쥐처럼 부엌과 거실을 오가신다.



우리 엄마

그런 할머니의 유일한 딸, 우리 엄마는 할머니를 닮아 비상했다. 엄마만큼 공부를 잘했던 학생들이 부모님의 반대로 근처 국립대에 많이들 입학했다고 했다. 다행히 엄마는 당시 통념에 젖지 않은 부모님의 지지 덕분에 당시 최고의 신붓감(?)으로 불리던 이대생이 될 수 있었다. (여대가 아니었어도 서울에 보냈을지는 미지수다. 할머니 말씀에 따르면, 보수적인 지역이었던 터라 모 남녀공학 대학교만 해도 왈가닥 여자애들이 간다는 인식이 있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엄마가 얼마나 대견하고 자랑스러웠을까.


그러나 엄마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해버렸다. (이 부분은 십 대 시절 내내 내가 가장 통탄했던 부분이다) 엄마는 나와 동생을 연년생으로 낳고는 남은 이십 대를 가정에 충실한 시간으로 보냈다. 그리고 내가 중학생쯤 되었을 때 심리 관련 학사를 다시 취득하고 대학원을 가셔서 지금은 심리 상담가로 활동하고 계신다.


그리고 나

나는 내 인생도 아니면서 엄마의 인생이 참 아쉬웠다. 누구보다 똑똑하고 매력적이었을 이십 대 청춘이 육아와 가정생활로 점철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목적 없는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왜 대학 졸업 후 자신의 인생을 살지 않고 바로 가정을 이루었을까 의문이었다. 그럴 때면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결혼해서 처음엔 음식을 못했는데, 된장찌개 보글보글 끓이면서 너희 아빠 기다리면 너무 행복했어’


엄마는 십수 년도 더 지났을 그 순간을 떠올리며 행복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절대 결혼 같은 거 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취를 시작하고 나서 엄마의 마음이 뭔지 알게 되었다. 더 정확히는 내가 요리를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엄마의 선택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재료를 다듬어 음식을 만들고, 사랑하는 사람과 조잘조잘 떠들며 밥을 먹는 순간의 행복함을, 이제는 알 것 같다. 가끔은 직업이 없어도, 돈이 없어도, 사랑하는 사람들이랑 같이 살면서 삼시 세끼만 잘 챙겨 먹으면서 살아도 삶이 재밌겠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그렇다고 당장 직장을 그만두거나 전업주부가 되고 싶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그냥 엄마의 선택이 이제는 공감이 된다고. 엄마 나름의 행복이 있었을 거라는 걸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왼쪽] 치즈를 좋아하시는 우리 엄마 [오른쪽] 햄도 없지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집 김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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