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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 Aug 04. 2023

처해진 가난과 선택한 가난의 차이

저는 자수성가해야 해서요

{EP9}


누군가 싸구려 월세방의 장점을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월세가 적으니 화도 적어."


내가 사는 25만 원짜리 월세방은 사실 문제가 많다. 비가 오면 벽지가 젖는 건 기본이고, 가끔 버스가 지나갈 때면 진동이 벽까지 전해진다. 부엌에선 바퀴벌레가 자주 출몰해, 불을 켤 때마다 두근거린다. 화장실에 갈 때마다 복도에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고 나가고, 세면대가 없어 쭈그려 앉아 양치를 세수한다.


객관적으로 불편함이 참 많은 집이지만, 불편함만 있을 뿐 불만은 없다. 월세는 적고, 나도 그 이상을 바라지 않는다. 기대가 클수록 상처가 큰 인간관계처럼, 나도 저렴한 월세방에 큰 것을 바라지 않고, 그리하여 쉽게 행복하다.


내가 자취하기 전에 살았던 집은 아파트다. 평수는 넓지 않지만 아늑한 실내 화장실이라든가, 쾌적한 방 구조라든가, 바람이 잘 통하는 고층 베란다라든가... 지금 자취방에 비해 호텔급 주거환경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늘 그 집에 산다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주공아파트였기 때문이다. 




대학생 때까지 우리 집은 임대 아파트에서 살았다. 먹고사는 데 부족함은 없었지만, 나를 둘러싼 환경은 늘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대학생 시절 첫 인턴을 했을 때의 일이다. 대기업 광고 회사의 인턴이었다. 어느 광고회사가 그렇듯 점심시간은 두 시간이어서 서로 알아도 되지 않을 사적인 이야기까지 시시콜콜 알게 되는 시간을 보냈다. 그럴 때 대학도 졸업하지 않은 이십 대 초반 인턴의 역할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거나 간간히 리액션하는 정도였지만. 회사원들의 관심사 파악을 통해 스스로 사회화시키기 위해 항상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사원분이 유럽여행에 가서 프러포즈한 이야기, 팀장님 자녀의 엘리트 입시 이야기, 대리님의 부부 싸움 이야기... 내가 들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다양하고 사적인 이야기가 화두에 올랐다. 특히 단골 주제는 '주말에 일어난 일'이었는데, 어느 날 나와 같은 대학 출신의 부장님이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자신의 동네에 임대 아파트가 들어온다고 해서 반대하는 주민 모임에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그는 질 낮은 학생들이 들어와 학군이 엉망이 될 것인데 곧 학교에 입학할 아들이 걱정이라며 하소연했다. 땅값이 떨어지는 것도 문제라며, 화룡정점으로 임대 아파트와 혐오 시설를 비교했다. 무슨 정의를 실현한 무용담이라도 되는 듯 이야기를 하는데, 듣는 내내 마음이 찔렸다. 


정말 냉정하게 생각했을 때 아예 근거가 없는 틀린 의견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절대 학군이 뛰어나다고 볼 수 없는 동네에서, 부지런히 노력해 원하던 대학에 갔고, 사회가 말하는 평범의 대열에 끼기 위해 직장인이 되고자 인턴생활을 하고 있는. 그러니까 그곳을 빠져나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살아온 산증인으로서 부장님의 반대가 어렴풋 이해는 간다. 그래서 더 쪼그라들었다. 혹시 나의 출신 아파트를 들킬까 싶어, 나의 가난을 들킬까 싶어 무척이나 조심해 가며 회사생활을 마쳤다.




벽지가 우글거리고 화장실도 밖에 있는 자취방엔 당당하면서, 살기 좋은 임대 아파트에 사는 걸 부끄러워했다는 건 참 웃긴 일이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처해진 가난과 선택한 가난의 차이라는 것이다.


어찌할 수 없는 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처해진 가난은 내가 원해서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부끄럽고 숨기고 싶다. 그런데 내가 선택한 가난은 내가 어떠한 이유를 가지고 선택한 가난이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선택한 가난이며, 지지리 궁상을 떨어도 내가 원해서 선택한 가난이다. 단지 그 차이만으로 부끄러움이 사라졌다.


지금은 내가 선택한 가난으로 부끄럽지 않게 살아간다. 직장인이 되었지만 나를 둘러싼 경제적 사항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 내가 얼마나 잘 먹고 잘사는지는 모두 나에게 달려있다. 가끔은 불확실한 미래에 마냥 가라앉고 싶을 때도 있지만, 얼마 전 직장 선배로부터 들은 말이 나를 끌어 올려주는 구명조끼 역할을 해주고 있다. 


‘저는 자수성가해야 하는 사람이라, 언젠가는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할 거예요.’


듣고 한참을 감탄했다. 얼마나 영리한가!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서, 가난해서…'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사용할 수 있는 온갖 자기 비하적인 표현 대신에 스스로의 처지를 객관적으로 파악해 쿨하게 표현한 말. (실제로 선배는 얼마 후 자기 사업을 하겠다며 퇴사했다) 물려받은 재산이 없는 인간으로서 당당하게 외치면서 살고자 한다. 


'저는 자수성가해야 하는 사람이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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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 저 성수동에서 자취해요 

{EP2} 구집자, 서울에서 집을 구하는 자

{EP3} 가계약금 반환 사건

{EP4} 25만 원짜리 월세방의 비밀

{EP5} 집 밖 화장실이 괜찮았던 이유


{EP6} 나의 밥을 뺏어먹는 남자

{EP7} 꽤나 실용적인 죽음의 쓸모

{EP8} 엄마가 요즘 들어 부쩍 많이 하는 말


ps. 날것이 모여있는 인스타도 놀러 오세요  @solus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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