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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산균 Nov 09. 2017

타자를 향한 시선

Andres Serrano의 아이콘

안드레 세라노의 사진 작업을 미술사의 고전으로 불리는 작품들 사이에서 만나게 된다면 어떨까?


'오줌 예수(Piss Christ, 1987)'로 시작된 파란은 90년대 중반 성의 역사 시리즈( A history of sex, 1995-1996), 에이즈 환자들의 혈액이나 정액을 이용한 작업(Fluid, 1980년대 후반)이나 시체보관소의 주검들을 클로즈업한 작업들(Morgue)을 비롯해 무기나 고문도구의 일부를 확대 촬영한 작업, 2010년대에 찍은 노마드 시리즈까지 이어지며 세라노만의 시선을 공고하게 한다.


그의 초기작부터 2010년대에 찍은 최근의 작업까지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전시가 쁘띠 팔레에서 열리고 있다. 상설전시장에 무료로 개방된 그의 작업들은 말 그대로 미술사의 아이콘들 속에 숨겨진 옥에 티 찾기처럼 느껴진다. 동시에 '이콘화들로 가득한 미술관이라는 아우라가 잔뜩 들어선 공간'에 '죽음과 섹스 그리고 반종교라는 이콘화'를 걸어놓은 참신한 기획에 박수를 보낸다.


반항과 논쟁의 아이콘 안드레 세라노, 막상 작가 자신은 신성모독과 선정성에 흥분한 관람자들의 비난과 작품 훼손에 대한 대답으로, 단지 아름다워 보여서 그랬다고 담백하게 대답하곤 했다. 가톨릭 배경과 이민자 부모 밑에서 자란 혼혈아 등등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 개연성을 찾고 싶은 욕망은 접어두고, 그의 작업이 고전과 만나 대화하며 일으키는 공명에 주목해본다. 쁘띠 팔레의 아름다운 컬렉션에 대한 한 동시대 작가의 질문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그들과 우리


파리를 지나가는 여행자들은 예상치 못한 파리의 모습에 놀란다.

거리에 아무렇게나 앉아있는 파리지앵들 조차도, 그들을 둘러싼 카페와 거리의 모습 상점들의 분위기가 멋있어서. 영화에나 나올 법한 풍경이 내 눈앞에 펼쳐지는 것에 감동한다.   

한편으로는 파리에 존재하는 너무 파리답지 못한 풍경들로 인해서 놀라기도 한다. 예를 들면 소매치기가 너무 많다거나 거리에서 담배 피우는 사람들이 많다거나 혹은 공공시설이 한국에 비해 너무 더럽다거나 얼굴이 하얀 프랑스 백인이 아닌 흑인과 유색인종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실망한다. 사실  이런 혼자만의 이미지와 의견이야 뭐 문제 될 것이 있을까? 누구나 자유롭게 판단하고 생각할 권리가 있는 것이니...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놀라움은 단편적 관찰을 기반으로 한 주관적인 판단이나 선입견에서 끝나지 않고 오만한 태도나 폭력적인 말투로 곧잘 이어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파리에 사는 흑인들은 가난하거나 소매치기 일 것이라는 판단. 기념품을 팔고 있는 흑인들은 뭔가 여행자들을 속이고 있을 것이라는 경계와 두려움. 이러한 주관적 감정은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거나 자신의 일상을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다. 반대로 백인들은 더 예의 바르고 뛰어나고 사회적인 지위가 높을 것이라는 편견은 과도하게 상대의 비위를 맞추려는 부자연스러운 말과 행동을 하게 한다거나, 그들의 부당한 대우에 대해서 조차도 침묵하게 한다.  





귀족 신사의 초상 아래 걸린 서부의 개척자와 대치중인 인디언. 귀부인의 초상아래 걸린 노숙자.


도시의 노동자들과 난민, 노숙인들의 모습을 주제로 한 안드레 세라노의 노마드 시리즈는 화려한 파리의 벨 에포크 시기와 겹쳐있다. 인상주의자들의 그림에 등장하는 도시인들은 우아한 옷차림으로 도시를 거닌다. 과거의 아름답던 시절, 아마도 현실에는 존재하지 못할 그 시절에 대한 동경. 딱 그 정도의 감정이 2017년 도시의 노마드(로 대표되는 타자; 세라노가 노숙자나 난민으로 지칭한)에게 던지는 우리의 '동정 섞인' 시선과 같은 무게를 갖는 게 아닐까. 노마드라는 말이 갖는 낭만적인 이미지와 구질구질한 현실 사이의 어디쯤.


타자에 대한 편견과 시선의 문제는 종교라는 소재와 만나 더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세라노는 불편할 정도로 직설적으로 이 질문을 던져왔는데, 쁘띠 팔레의 작품들과 교차하며 보는 그의 작품은 그의 주제를 더욱 명확하게 이해시켜준다. 작가는 단지 예수의 부활 혹은 성경의 주제들에 대해 반기를 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신화화되어온 그 맥락과 구조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있다.


백인 남성으로 대표되는 주체 안에서 성경과 신화,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은 아름답게 보일지 몰라도, 조금 다른 맥락으로 그것을 바라본다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주제로 한 그림들이 걸린 공간을 들어서려면, Blood Cross를 지나야 한다. 9/11이후 찍은 작업


오줌 속에 빠진 그리스로마신화의 신들
피에타, 그러나 흑인예수
잔다르크, 그 사이로 눈을 가린 시체보관소의 시신과 죽음


고대의 유물 옆, 우리를 겨누고 있는 총구



제단화의 형식을 떠올리게 하는 디스플레이, 한 수녀의 가지런히 모은 손(Soeur jeanne Myriam, 1991)과 소녀 미인대회의 우승자(America's Little Yankee Miss, 2003) 사이에 걸린 트럼프의 얼굴은 이뤄지지 않을 아메리카 드림과 종교를 등에 업은 트럼프의 묘한 미소를 보여주며 끝맺는다. 세라노의 작업이 파격적인 주제때문에 과대평가 되고 있다고 여겼는데, 오히려 그 스캔들 때문에 그의 시의적절한 질문들이 제대로 평가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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