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루이비통 재단, 바스키아+에곤실레전
프랭크 게리와 베르나르 아르노의 합작으로 2014년 개관한 이래, 루이뷔통 재단 미술관은 정말 이들 만이 할 수 있는 블록버스터급 전시를 꾸준히 기획해 히트 시키고 있다. 2018년 10월부터 열린 에곤실레+바스키아 전은 28세에 요절한 두 젊은 화가의 작품을 회고전의 형식으로 보여준다. 일단 15일의 전시기간을 남겨놓은 시점에서 (어떤 전시든 마지막주에 사람이 몰린다는 걸 고려할 것) 52만명의 관람객 수를 기록하여 시츄킨(러시아 최고의 컬렉터, 고갱과 마티스를 다수 보유함)전의 기록을 가볍게 넘어설 듯하다. 일단 일주일 연장전시를 계획했고, 마지막 주에는 아침 8시부터 밤10시까지 개장하기로 결정했다. 에곤 실레전은 예정대로 철수 하기로 했다니, 그렇다. 난 마지막주 마지막날 전시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에곤 실레의 힘있는 선과 과슈물감의 두껍지 않은 색번짐을 좋아하지만, 딱히 꼭 열심히 다시 보아야 할 필요성을 못느껴서 였고, 바스키아는 미술시장에서 확실히 과대평가 된 것이 아닐까 늘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최근 바스키아의 그림이 일본의 사업가인 마에자와 유사쿠의 손에 1246억원에 예상가에 비해 '아주 비싸게' 낙찰되면서 돈으로 환산되는 그림같아져서 좀 정떨어졌달까. 또 막상 그렇게 말하기엔 바스키아를 제대로 본 적은 없는 것 같아, 양심상, 제대로 들여다봐야 할 것만 같았다.
기획은 너무 명료하다. 앙팡 테리블(Enfant terrible), 동시대에 살던 이들에게는 '문제아', '반항아'로서 살아가다가 천재라는 명성에 걸맞게 요절했다는 점,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동유럽의 1차대전시기와 60-80년대의 뉴욕이라는 급격한 변화의 시기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비교해 볼 만한 화가들이다. 뮤지엄보다는 갤러리와 미술시장의 화가답게 바스키아의 작품은 개인 소장품이 많다. 이걸 한 자리에 전시하기 위해 기획팀에서는 개인 수집가들을 오랜동안 컨택하고 설득했다고 한다. 일단 물량공세 성공!
한 자리에서 한 번에 두고 보기 어려운 양의 작품들을 시대순으로 보니, 그 작가가 보였다.
루이비통에서는 '마이크로 비지트'라는 전시장의 각 관마다 15분 정도씩 해설 프로그램이 있다. 길지 않은 시간동안 각 방을 전체의 흐름 안에서 소개해주고, 자유롭게 질문을 받기도 한다. 해설사로 참여하는 이들의 수준이 일정하고 잘 교육을 받아서인지 작품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전에 나에게 바스키아는 하루 아침에 뜬 어느 아이돌 가수 같은 이미지였는데,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이미지와 상징, 세계관을 마주할 수 있어서 일관성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예술가로서의 바스키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여전히 검은 피카소라는 수식어는 좀. 오버인 것 같지만.) 바스키아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스스로도 자주 말했듯, '유명해지기'였기 때문에 아마도 피카소가 추구했던 테크닉적인 실험은 그리 우선순위가 아니었던 것 같다. 내용적인 발랄함에 비해 테크닉적으로는 변화가 없어 그런 면은 좀 심심한 느낌이 든다. 물론,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실현되었을지도..
뉴욕에 사는- 비록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음에도- 부모와 분리된 채 거리를 방황하는 20대의 흑인 젊은이는 벽에 낙서를 하며 SAMO 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했고, 갤러리스트들의 눈에 띄어 혜성처럼 단숨에 스타가 된다. 그리고 앤디워홀과 전시를 기획한다. 뮤지엄에 입성하는 최초의 흑인화가가 되겠다는 의지로, 흑인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분야인 재즈음악이나 복싱과 같은 이미지를 사용하였고, 자본에 의해 조작된 자유, 인류애 등의 이미지에 의문을 제기한다.
전쟁, 폭탄,
왼쪽 상단에 쓰인, 80년대 미국의 부의 지역차를 볼 수 있는 미국의 주별 일인당 평균수입, 아프로 아메리칸들이 주로 모여 살았던 주의 빈곤함을 보여주는 수치로 바스키아의 작품에 낙서처럼 자주 등장한다. 가시관인듯, 왕관인 듯한 무언가 인물의 머리 위에 올려져있고, 흑인이지만, 한쪽 다리는 하얀 색이 칠해져있다. 아마 그는 복싱선수인듯하다. 한쪽 팔에는 자유를 상징하는 횃불이 들려있다. 자유의 여신상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자유롭지 않은 현실, 여전히 차별이 존재하는 사회가 그에게 이렇게 표현된다.
실제 밴드활동을 하고 노래를 만들었던 바스키아는 냇킹콜, 마일스 데이비스 등 재즈 뮤지션들에대한 오마쥬 가득한 작품들을 많이 남긴다. 그래서 한 공간의 주제가 음악이다.
후반기에는 역시나 아이티 출신의 아버지를 두었던 그에게 영감과 호기심을 불어넣은 아프리카의 토속적인 메타포들을 사용한다.
워홀과 바스키아. 워홀이 바스키아를 키워준건 전혀 아니었고, 바스키아가 한물간 워홀에게 다시 영감을 불어넣었다고 보는게 맞다. 하지만 둘의 사이는 오래가지 않음. 전시가 실패하고 사이가 틀어졌던 두 사람은 서로 만나지도 않았는데, 워홀이 죽고 바스키아는 충격에 휩싸였다. 얼마안되,바스키아도 약물중독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삼면 패널화의 이미지를 자주 사용한다.
자신의 삶을 관통하는 '분노'라는 감정+좋아하고 응원하는 것에 대한 '경외'라는 양극단의 감정이 저런 알록달록한 색채와 과격한 선으로 표현하는 예술가로서의 바스키아를 알게되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