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로트 페리앙의 새로운 세계@파리루이비통재단
<샤를로트 페리앙의 새로운 세계>라는 제목으로 파리 루이뷔통 재단 미술관에서는 샤를로트 페리앙(1903-1999)의 서거 20주년을 기억하는 전시를 열었다. 2019년 10월 2일부터 2020년 2월 10일까지 열리는 이 전시는 20세기 시작에 태어나 21세기가 오기전 숨을 거둔 그녀가 프랑스에서 두번의 큰 전쟁을 겪으며 펼쳐가는 건축가이자 디자이너, 예술가로서의 작업 연대기를 보여준다. 2019년은 바우하우스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들이 독일을 중심으로 열리고 있는데, 특히 지난 10월 fiac에서 선보인 장 프루베의 모듈이나 샤를로트 페리앙의 이 회고전도 바우하우스와의 교집합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올해 유럽 전시의 흐름에도 부합하는 대규모 회고전이다.
https://www.fondationlouisvuitton.fr/fr/expositions/exposition/charlotte-perriand.html
페리앙이 이름이 생소해도 상관없다. 전시는 그녀가 함께 작업했던 건축가, 디자이너, 화가들을 통해 그녀를 소환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녀는 단지 조수나 영감을 주는 뮤즈가 아니다. 오히려 일관된 자신만의 아이디어와 목적을 갖고 시대에 맞게 필요한 것을 제공했던 예술가이다. 따라서 이 전시는 오랜동안 남성 건축가와 디자이너에 의해 쓰여진 건축사를 다시쓰는 기획이기도 하다. 대중에게 20세기 전후시기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프랑스의 건축가는 장 프루베와 르코르뷔지에 이겠지만, 나도 이 전시를 통해 페르낭 레제, 프루베, 코르뷔지에의 작품으로 알고 있었던 건축과 인테리어 가구들이 샤를로트 페리앙과의 협업임을 처음으로 알게되었다.
20세기를 시작하는 1903년에 파리에서 태어난 페리앙은 24살이던 1927년 장식미술학교의 아카데미즘에 대해 불만을 느끼고, 아방가르드 건축가였던 르 코르뷔지에의 아틀리에에 찾아간다. 건축은 남성의 직업으로 여기던 그 시절, 코르뷔지에는 페리앙에게 우린 바느질 할 쿠션이 없으니 돌아가라고 했다. 자신의 작업에 자신이 있었던 그녀는 내가 필요하면 연락을 하라는 말과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남기고 떠난다. 그녀의 작업들은 매우 간결한 라인과 메탈 소재로 구상한 인테리어와 가구들이었다. 이에 큰 인상을 받은 코르뷔지에는 자신의 아틀리에에 그녀를 다시 부른다. 그의 아틀리에에는 전세계에서 모인 건축학도, 디자이너, 도시설계자들이 뒤섞여 있었고, 그 안에서의 작업은 건축과 디자인 도시와 자연을 교차하는 것들이었다. 페리앙은 그곳에서 신선한 만남과 다양한 영감을 얻는다.
사회적으로 20-30년대에 파리는 산업화와 기계문명의 바람이 불고있었다. '기계, 자동차, 기술' 은 사람들에게 편리함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여겨졌고, 이러한 빠른 변화는 당연히 건축과 디자인의 재료에 영향을 주었다. 코르뷔지에와 페리앙은 인간이 머무는 장소를 민주화해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했다. 그리고 이들은 빌라사부아를 함께 설계했고(1925년), 1929년 파리의 살롱도톤에서 자신들의 콜라보 작업을 선보였다. 가구가 차지하는 공간과 불필요한 장식을 최소화하고, 기능성을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당시 유럽을 휩쓸던 바우하우스 운동과 궤를 같이한다. 이 시기에 페리앙이 구상한 긴 의자, 인간이 앉고 눕는 다양한 자세를 기반으로 한 의자 등은 인간의 움직임과 자유를 극대화 하는 것들이었다. 코코 샤넬의 여성복 디자인이 등장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여성의 신체 사이즈와 키, 자세에 맞는 가구들. 여성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주방의 사이즈와 동선을 고려한 디자인은 샤를로트 페리앙이 아니었다면 코르뷔지에가 스스로 고안해 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 앙투아네트의 거실과 가구에서 머물고 있는 파리사람들에게 메탈로 만든 의자가 눈에 들어왔을리 만무하다. 그 뿐 아니라, 모듈에 맞춰 대량 생산, 시리즈로 제작해야하는 이런 가구를 만들 준비가 된 공장도 없었다. 상용화를 위해서는 아직 기다려야 했다. 루비뷔통 재단의 전시장에서는 각 시기마다 했던 이들의 콜라보작업을 그대로 재현해 놓아, 관람자들이 의자에 앉아보고 실제 공간을 체험해 볼 수 있도록 꾸며놓았다. 20년대에 기능주의 시기에 함께 했던 소니야 들로네나 페르낭 레제의 작업도 전시장에 함께 걸려있다. 비록 매체는 달랐지만 이들이 갖고 있던 공통적인 이상향, 자유와 근대화에 대한 아이디어를 보여준다.
정치적으로는 국민전선 활동을 통해 사회의 가난과 비민주화를 고발하고, 그에 대항하는 방식으로 공간을 구현한다. 그러나 이 시기의 프랑스의 도시들은 엄청난 가난과 비위생적인 주거환경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시기 페리앙은 가난한 대중들을 위한 주거지를 마련하는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이후 1946년 완성되는 코르뷔지에의 마르세유의 공동주택 프로젝트도 바로 이 일환이다.) 모듈화된 정리공간과 작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이용해 각 구성원들의 독립공간을 마련한다는 목적이다. 1936년 프랑스의 노동법에 유급휴가가 제정되면서 이 기획은 휴가지에서의 임시거처에 관한 기획을 바뀌게 된다.
샤를로트 페리앙에게 인테리어와 건축은 인간의 삶을 예술로 만들어주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고, 이 과정에서 개인의 삶을 변화시키는 사회의 변화에 민감했고, 이를 자신의 작업에 적극적으로 녹여낸다. 베이비 붐 시절 모든 가족구성원을 수용할 수 없는 집안의 구조가 어떻게 효율적으로 달라지는지 볼 수있다.
페리앙의 상상력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다른 소재와 매체들을 찾아가는 시기가 30년대인데, 이 시기 몽파르나스에 거주하고 있었던 그녀는 몽파르나스 학파의 예술가들과 영향을 주고받는다. 보헤미안적인 분위기와 자유로운 영감을 중요하게 여겼던 그들은 끊임없이 이전에 없던 소재를 찾아다닌다. 아트 브뤼, 자연의 소재를 이용하는 혹은 자연 그대로에서 영감을 받아 재현하는 방식은 몽파르나스에 아틀리에를 마련했던 이때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페르낭 레제는 이 시기 페리앙의 가장 가까운 파트너였다. 노르망디 바다에서 발견한 돌, 나무, 나이테, 자연의 형태, 모래와 파도, 파도가 옮겨놓고 간 동물의 뼈 등은 기계적인 직선에서 자연의 곡선으로 이동하게 한 근간이 되었다. 바다 뿐 아니다. 페리앙의 창작에 가장 중요한 원천인 산은 세상을 극한의 공간에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마침내 꼭대기에 올라 대상을 관찰하는 방벙을 가르쳐주었다. 그 결과로 1935년 브뤼셀 살롱에 출품한 페르낭 레제와 코르뷔지에와의 콜라보를 보면, 메탈의 차가운 금속에 인간의 손이 다듬어낸 부드러운 나무의 결이 공존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페리앙이 일본으로 떠난 날은 정확히 독일 나치가 파리를 점령하기 이틀 전이었다. 전쟁을 피해 떠나는 이기적인 선택에 고민하고 있던 그녀에게 오히려 친구들은 용기를 불어넣었다. 코르뷔지에의 아틀리에에서 만나 교류했던 일본인 친구와의 인연으로 국가 초청을 받아 현지의 예술학교들과 장인들, 일본의 문화를 체험하게 된다. 유럽의 문화에 익숙해 있던 그녀에게 이 체류는 그야말로 쇼킹했는데, 다다미 방과 일본식 건축의 자연친화적 구조, 여백과 젠의 문화가 그녀를 감동시켰다. 그 결과물이 바로 전시장의 중간 섹션 쯤에 보인다.
기존의 유럽의 메탈은 이제 나무로 탈바꿈 했고, 금속성의 차가움은 나무의 부드러움으로 대체되었다. 당시 일본은 유럽식의 모더니즘을 국가적으로 추진하고 있었고 그 일환으로 초대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현지의 건축학교 학생들에게 강연을 통해 그들만의 번역으로 만들어낸 새로운 작업을 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그녀는 일본에서 비움이라는 그동안 생각지 못했던 아이디어를 얻어서 돌아온다.
비움을 창조해보는 것, 검정색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점은 이후 학생기숙사와 도서관 프로젝트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소비를 위한 노동을 지양하고, 자연에 가까워지는 공간을 설계하기 위한 노력은 그녀의 나이 86세까지 계속된다. 자연에 최소한의 영향을 주면서 자연과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은 스키장 별장 건축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17제곱미터의 작은 복층구조 안에, 차를 마실수 있는 공간은 물론 4인가족이 모두 쉴수 있는 공간과 자연으로 열려있는 테라스를 만들었다.
전시장의 곳곳은 페리앙이 설계한 공간을 그대로 옮겨놓았는데, 물위에 떠있게 지어진 바캉스용 별장과 아래의 일본식 정원안에 지어진 다다미 공간이 단연 인기있었다. 관람자들은 단순히 스케치와 아이디어가 아닌, 그녀가 구현해놓은 공간에 앉아보고 들어가보고 그녀가 생각했던 삶의 예술이 무엇인지, 모든 사람이 갖는 자유로운 공간이 무엇인지 한번쯤은 상상해볼 기회를 갖게 된다.
20세기를 시작하는 1903년에 태어나 1920년대 르 코르뷔지에, 피에르 잔느레와 함께한 기능주의 시기와 코뮤니스트의 시기를 거쳐, 1930년대 자연의 모티브에 눈을 돌린 시기, 1940년대 일본과 브라질 체류기라는 전반기는 다양한 스타일의 실험과 연구의 시기였다고 볼 수 있겠다. 이후 20세기 후반은 이전의 스타일을 하나로 엮어내고 실현하는 과정이었다. 90대의 나이까지 활발하게 활동하며 자신의 한계를 계속 실험해 갔던 이 20세기의 예술가는 21세기에 보아도 아방가르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