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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산균 Jan 30. 2019

자코메티를 읽는 또 다른 방법, 실존보다 움직임

알베르토 자코메티전, 파리 마이욜 미술관

자코메티의 작년 한국 전시가 획기적인 성공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그리 관심을 갖지 않았던 작가의 전시도 이례적인 성공을 거두었다는 말을 듣는다면 다시한번 차곡차곡 훑어보고 싶어진다. 내가 그에 대해 잘 몰라서 좋아하지 않았던가? 아니면, 내가 오해한 부분이 있나? 새롭게 다시 읽어보고 공부하려고 하는 편이다. 나에겐 특히 조각가들이 그러한데, 로댕이 그렇고 브랑쿠시가 그렇다. 그리고 이번엔 자코메티가 그렇다. 


아마 자코메티가 현대인에게 주는 가장 공감가는 지점은 그의 성실한 노동과 그가 내놓은 작품들이 우리의 일상을 다른 차원에서 보게 만들어주기 때문이 아닐까. 일상의 지겹고 사소한 숙제들에서 벗어나 조금 더 고급스러워보이는 실존의 문제를 생각해보게 만든다는 것. 과거에는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 종교였다면 지금은 예술가들에게 그 역할이 부여되는 것 처럼 보인다. 사실 자코메티 자신이 의도하진 않았을 수도 있지만, 그는 일정 부분 현대인에게 예언자의 노릇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너희가 가고 있는 길이 어디냐를 묻는, 그리고 열심히 길을 가라고 조언하는 예언자. 더 정확히는 그의 작품을 그렇게 읽기를 주저하지 않는 분위기다. 


자코메티의 작품을 실존주의/ 특히 베케트와의 연관성을 통해 의미를 해석하다보면, 그의 작품이 가진 조각사적인 맥락이 거세되는 경우가 많다. 아무래도 감동적이고 직관적인 해석과 지루한 미술사의 조합은 별로 매력적이진 않다. 이런 맥락에서, 철학에서 조금 멀어져서 미술사의 영역으로 들어간 마이욜 뮤지엄의 담백한 기획에 감사를 표한다. 작품에 너무 수많은 해석을 '미리' 부여해버리는 게 어쩐지 불편하기 때문이다. 주관적이고 시적인 해석보다 엄밀한 미술사/조각사적인 지도 안에서 그를 설명해주는 전시였다. 


보통의 조각가들은 세밀한 형태를 재현하는 구상에서 비구상(추상)으로 이동하는데 반해, 자코메티의 작업은 자드킨, 브랑쿠시, 로랑스에게서 볼 수 있는 비구상에서 / 마이욜이나 부르델이라는 구상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그 정점에는 로댕과 걸어가는 사람있다. 전시는 각 시기별 자코메티와 영향을 주고받았던 조각가들의 작품과 자코메티의 작품을 비교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자드킨/ 브랑쿠시와 자코메티
앙리 로랑스와 자코메티
부르델과 자코메티 
마이욜과 자코메티
로댕과 자코메티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로댕의 걷는 사람을 스케치한 이 작품이 나에겐 전시의 하일라이트라고 여겼는데, 자코메티를 독립적인 천재 조각가로서 아우라를 부여하지 않고, 수많은 조각을 가로질러 자신의 갈길을 찾아낸 사람으로 독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냥 자코메티 그대로의 자코메티.

이렇게 조각사를 새롭게 쓴 인물

형상과 비형상의 역사를 뒤집은 것도 그렇고, 아주 고전적인 받침을 되살린 기획도 그렇고 

인간이 캐릭터를 담은 대상으로서의 눈도 그렇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자코메티-

그런 면에서 재미있는 발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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