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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산균 May 09. 2020

결핍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

앙리 툴루즈 로트렉의 자유로움, 과감한 모던 전@ 파리 그랑팔레 


<미드나잇 인 파리>의 대미를 장식하는 이 장면! 의자에 앉아있는 로트렉, 그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드가와 고갱. 합석하고픈 테이블이다. 로트렉의 그림이 탄생할 수 있었던 분위기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잘 재현해낸 장면이다. 흥겨운 음악이 흐르고, 테이블 위엔 잔이 놓여있고, 자신의 몸을 의지해야 할 지팡이는 테이블에 비스듬히 새워두고, 무대에서 춤추는 이들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관찰해 순식간에 그려내고. 지나가던 친구들과 인사를 나눈다. 



0. 보들레르의 모던 그리고 로트렉의 순간, 과감한 모던 résolument moderne 


도시적이고 세련된 디자인이나 혹은 대상에 일상적으로 붙이는 ‘모던하다’라는 수식어는 19세기 중반에 파리에 있던 시인이자 미술비평가 보들레르를 통해 본격적인 예술의 장으로 들어왔다. 툴루즈 로트렉보다 한 세대를 앞서 살았던 보들레르는 ‘모던한 삶의 화가(Le peintre de la vie moderne,1863)’라는 글을 통해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모던’이라고 말한다. 


이 질문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의 예술세계를 <과감한 모던>이라는 제목으로 재해석해 낸 그랑팔레의 전시와 조우한다. 툴루즈 로트렉이 활동할 때 쯤엔 이미 보들레르는 이 세상에 없었지만, 아마 보들레르가 정의하고 싶었던 새로운 속도와 도시의 공기를 로트렉은 잘 시각화했다. 


파리 그랑 팔레에서 1992년 열렸던 회고전 이래로,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1864-1901)은 몽마르트와 벨에포크 시대를 대변하는 화가들 중 하나로 다루어져왔다. 27년만에 열린 이번 개인전은 화가 개인의 예술세계에 초점을 맞추어 그의 매체적인 실험과 미술사적인 성취 그리고 대상을 보는 개성있는 시선을 조망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오르세와 오랑주리의 콜렉션과 함께 한 2019년 버전의 본 전시는 화가의 고향인 알비의 툴루즈 로트렉 미술관의 작품들은 물론 프랑스 국립박물관에 보관된 잡지의 일러스트, 포스터, 석판화에 이르기까지 총 225점의 작품을 소개한다.  장애를 가진 난장이 화가, 귀족이지만 몽마르트의 밤 문화와 향락을 즐기던 물랑루즈의 포스터 화가로 로트렉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왜 그가 20세기 아방가르드의 선구자로 불리는지 설득한다. 




1. 알비의 낮


로트렉은 대대로 엄청난 부를 축적한 지방의 부호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당시에 귀족들이 종종 그랬듯 자신들만의 뛰어난 DNA를 보존(?) 하기 위해 근친결혼을 하곤 했다. 근친결혼에 따라오는 유전병은 그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고, 13살에 대퇴골이 부러지면서 더 이상 뼈가 자라지 않는 병이 발현된다. 그전까지 그는 아버지를 따라 사냥과 승마를 다니고, 스키를 즐기는 소년이었다. 고칠 수 없는 유전병이라는 것을 알게 된 그는 더 이상 학교를 다니지 않고, 혼자 그림 그리는 것에 매달리게 된다. 아마 자식의 병이 자신들에게서 온 것임에 죄책감을 느꼈을 그의 부모들은 그를 물심양면으로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미술에 대한 재능을 알아보고 용기를 주었으며, 어머니는 그를 데리고 여행을 다녔으며 파리로 올라온 후에도 오랫동안 서신을 주고받는다. 


37세에 죽음을 맞이한 이 다작의 화가는 평생 크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자신의 모습에 고통을 느꼈다고 한다. 지금의 로트렉 팬들에게 1m 52라는 키는 그의 비범함과 존재감을 설명하는 다른 명함이지만, 그는 늘 외로움을 느꼈고 우울증을 앓았으며 그런 정신적인 고통과 결핍이 매음굴과 알코올 중독, 삶의 그림자로 그를 이끌었다. 


18세의 나이에 파리의 미술계에 첫발을 디딘 그가 레옹 보나 같은 고전적인 아카데미의 스승에게 찾아간 것은 어쩌면 너무 당연한 것이었다. 레옹 보나는 로트렉의 그림을 이렇게 평가했다. 

"나쁘지는 않은데, 데생은 끔찍하군"

이후에 옮기게 된 페르낭 코르몽의 화실에서는 조금 더 자유로운 매체의 사용을 배웠고, 특히 밖에서 그림을 그리라는 조언을 듣기도 했다. 이곳에서 고흐를 만나기도 한다. 낮에는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저녁에는 몽마르트르의 카바레를 다니기 시작한다. 

코르몽 화실에 다닐 때 그린 데생들
로트렉이 그린 고흐




2. 몽마르트르의 밤


로트렉이 나고 자랐던 단정하고 고요한 알비의 낮과는 180도 다른 몽마르트르는 로트렉에게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고, 일종의 판타지를 실현시켜주는 공간이었다. 


밀려드는 주문과 유명세로 경제적으로는 부족할 것이 없어 보였지만 외로운 그가 진짜 친구로 편하게 여겼던 이들은 몽마르트르 뒷골목의 육체 노동자들이었다. 로트렉의 인물들은 그 스스로 가장 많은 감정이입을 했던 몽마르트르의 친구들이다. 몽마르트르에서 여성 모델 누드를 그렸던 화가들은 많지만 로트렉의 누드는 건조하고 중성적인 느낌을 준다. 대상에 대한 어떠한 가치판단도 없는 '인간의 육체'로서의 여성 누드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성병검사를 받기 위해 줄을 선 매춘부들의 모습이나 무대 뒤 댄서들의 모습은 매혹적이거나 아름답게 보이려 애쓰지 않는다. 춤을 추고 있는 라 굴뤼의 아름다움보다는 속도와 선을 그린다. 





이러한 자유로운 주제에 더해진 것은 1878년 발명된 리소그래피 즉, 석판인쇄 방식이 적극적으로 도입된다. 주로 포스터 등의 인쇄기술에 사용되었던 리소그래피는 물랑 루주의 포스터화, 서커스 포스터 다양한 인쇄물의 일러스트에 적용되었다. 석회가루를 뿌려서 독특한 질감을 표현한 작품, 앤디 워홀을 떠올리게 하는 포스터 시리즈들.  일본 판화에서 기인한 여백과 대담한 구도 역시 로트렉에게 많은 영향을 준다. 


이런 주제와 형식적인 면에서의 실험(그 자신에게는 실험이 아니었을) 덕분에 로트렉의 그림은 그 누구와도 다른, 자신만의 확고한 느낌과 서명을 완성한다. 이렇게 '자유로움'을 획득하게 된다. 



3. 


그의 예술세계를 총망라하는 이 거대한 기획은 로트렉의 개인적 결핍이 결국 예술적인 자유로움이라는 성취로, 그 성취가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화가의 개성으로 결론지어짐을 보여준다. 그래서 자연주의도 인상주의도 후기인상주의로도 분류할 수 없는 그만의 인장을 만들어냈다. 과감한 모던. 보들레르가 포착하고자 했던 그 공기는 비로소 이렇게 완성된다. 

보들레르의 모던은 고루한 역사시대 분류는 아니며, 자신의 주변을 바라보는 새로운 태도를 의미한다. 지금도 유효한 질문 "우리는 어떤 존재이며,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하고있는가." 에 대한 시각적 재해석, 툴르즈 로트렉. 

 

전시 전경, 광활한 그랑팔레 전시장 그러나 꽉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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