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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산균 Nov 30. 2019

해체와 미완의 인상주의자

베르트 모리조 개인전@ 파리 오르세 미술관

몇 달이 지난 전시이긴 하지만, 최근 다시 읽게된 린다 노클린의 논의와 관련해 베르토 모리조를 다시한번 조명해봐야할 것 같다. 노클린은 '왜 위대한 여성 예술가는 없었는가?'라는 논문에서 남성에 의해 구축된 미술사와 제도에서는 '위대한'과 '예술가'는 공공연하게 남성에게만 부여되는 지위였음을 밝힌다. 무려 1971년에 발표한 논문임에도 불구하고 2019년인 지금까지도 사골국물처럼 우려지며 여성주의 미술비평의 틀을 제공했다. 의식적으로 붙이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너무나 습관적으로 '여성 감독' '여성 작가'라는 말을 내뱉어 버리곤 한다. 무의식적으로 '여성'이 괄목할 만한 예술적 성취를 이루었을 때는 주체가 '여성'임을 한번 짚고 넘어가줘야만 하는 걸까? 학계와 사회 내에서 '주류 미술사에 대한 인식과 비판'이 어느정도 합의된 2019년에 다시 노클린을 적용해본다면, '여성 예술가'로 치부되었던 예술가들이 미술관의 '위대한' 대표 (남성) 예술가들의 경유하지 않고 그들만의 작품세계를 읽어보는 것에서 시작하면 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는 그런 시도에 잘 부합한 전시가 오르세의 <베르트 모르조> 전시였다. 제비꽃을 든 마네의 모델, 드가의 친구, 인상주의의 여성화가라는 수식어로만 설명되곤 했던 베르트 모리조를 '위대한 화가'로 재평가 해볼수 있는 개인전이 마련되었다.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열린 개인전이었다고 하니, 전세계인이 사랑하는 인상주의야말로 주류 남성 부르주아 문화임은 말할것도 없고, 그것을 소개하는 중심도 여전히 모네와 르누아르임은 심히 유감스럽다. 인상주의의 스타일에 그리 흥미를 느끼지 못해 관심도 없었고 그래서 그의 그림에 오래 머문적이 없었던 화가이기도 했던 모리조는 동시대 다른 인상주의자들에게서 발견할 수 없는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보여주는 매우 오리지널한 화가였다. 


이 전시는 외적으르는 해체, 작품의 내적으로는 미완이라는 키워드로 읽어볼 수 있겠다. 


/해체/

에두와르 마네의 동생과 결혼한 모리조는 '마네'라는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고 '모리조'라는 자신의 성으로 끝까지 활동했다. 여성화가에게는 공식적인 전시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던 시대 상에 걸맞게 언니인 에드마 모리조와 함께 그림 교육을 받지만 마땅한 전시자격을 얻지 못했다. 모리조가 대중에게 자신의 그림을 걸 수 있었던 전시는 1874년에 열린 인상주의전의 전신 <무명화가들의 전시>에서 였다. 이 전시에 출품했다는 것은 미술사 적으로 여성화가가 드디어 어떤 '예술운동'의 일원으로 포함되었다는 중요한 기록이다. 비록 바로크 시대의 위대한 젠틸레스키 같은 화가가 있었으나, 바로크를 이야기 할때 우리는 카라바조만을 기억한다. 

비록 인상주의자들의 전시에는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류 예술제도의 흐름에 속하지 못했던 그녀의 작품은 모네와 르누아르가 아트신의 중심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에도 콜렉터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따라서 그녀의 콜렉터들은 주로 미국인들이었다. 

사회적 배경에서 뿐 아니라 작품의 소재와 주제에서도 그녀의 행보는 파격적이다. 그녀가 그렸던 대상은 물론 언니와 조카 자신의 딸, 집안에서의 여성등이 주를 이루지만, 적지 않은 수의 그림이 자신의 남편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여자화가가 그린 남자. 자신의 남편을 모델로 그림을 그리는 일은 적어도 미술사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남성은-종종 여성화가들의 그림 분석에 많이 등장하는-트라우마와 폭력제공자가 아니라 관조와 관찰의 대상이다. 이런 면에서 젠틸레스키부터 프리다 칼로까지, 여성이라는 수식어로 설명하는 화가들이 재현한 남성의 이미지(폭력의 주체)에서도 벗어난다. 모든 스테레오타입의 해체는 베르트 모리조를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이다. 


/미완/ 

당대의 비평가들에게 '미완성의 천사'라는 별명-물론 비난-을 얻었던 모리조의 작품들은 다른 인상주의자들의 작품과도 공통적이게 미완성의 느낌을 준다. 그냥 쓱쓱 그려넣은 붓자국의 움직임, 밑칠을 하지 않은 날것의 캔버스, 얇은 질감과 색채 등은 인상주의자들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인상주의자들의 작품과는 달리 그녀의 작품에서는 위계질서에 대한 거부가 더 중요하다. 인물과 배경 사이의 경계없음은 '빛과 그림자'라는 주인공을 설정한 모네와도 다르고 '인물'이라는 주목대상을 설정한 르누아르와도 다르다. 순간적인 움직임의 포착이라는 면에서 드가와 공명하지만 완벽한 데생에 기반하고 있는 드가의 완결품과도 다르다. 

주체는 마치 움직임과 같고, 캔버스의 표면은 살아 움직이듯 유동한다. 이것이 베르트 모리조가 보여주는 에너지. 진행 중인 작품(work-in-progress)의 의미이다. 


처음 접하는 수많은 모리조의 작품은 이런 맥락 안에서 하나로 연결해 볼 수 있다. 개별작품의 독특하고 신비로운 색채는 물론이고. 전시에 소개된 몇몇 작품들을 첨부해본다.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내면에 빠져있는 여인

/노동하는 장면

/배경과 인물의 차이를 지워버리는 구성

/딸과 노는 아빠의 모습을 엄마가 그림




최근 나온 '마네의 제비꽃 여인'이라는 영화제목도 그렇고 수많은 에세이나 비평에서 모리조를 마네의 모델 혹은 연인으로 객체적으로 그리고 있는데, 사실 마네와 모리조는 동료관계였다. 마네가 일방적으로 모리조를 가르치거나 조언을 한 것은 아니었고, (미술계에서 차지하는 마네의 지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마네에게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도록 권유한 사람이 베르트 모리조였다.에두아르 마네의 동생 외젠 마네와 결혼한 이유도 외젠 마네가 모리조가 '직업화가'로 활동하는 것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제 1 정체성을 '화가'로 구축하고 꾸준히 그 길을 걸어간 '위대한 예술가'에게 박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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