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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눈 Dec 13. 2022

눈사람

처럼 애를 써서 만들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고 일어나니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 있다.

우리는 밖으로 뛰어나가 눈을 뭉치고 굴려 눈사람을 만든다.

흙이 묻지 않은 하얗고 깨끗한 눈을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눈을 뭉친다.

만들고 난 눈사람은 잘 세워두고 나면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해가 뜨면 곧 녹아 없어질 눈사람이지만 우린 눈사람을 만드는 것으로도 즐거웠다.




고등학교에서 선생님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8시간 근무 중에 

3~4시간 정도는 수업, 

1~2시간은 담임으로서 학급 조례, 종례, 급식지도, 청소지도

(부장교사는 업무 계획과 운영, 보고서 작성, 관리자와 수시 회의), 

2~3시간은 폭탄같이 날아오는 메신저 처리 및 공문 접수 및 보고 처리, 

1~2시간은 수업 자료 준비로 시간을 활용하려고 노력한다.

게다가 이 모든 시간은 수업 중간중간으로 쪼개어져 있다.


하지만 이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굵직한 일일 뿐 그 외에도 해야 할 일은 많다. 

학급 학생과 교과 담당 학생의 각종 상담, 질의응답, 수업 내용에 대한 피드백, 

평가 문제 출제 및 채점(정기고사 4회, 과정 중심 평가 최소 4회, 각종 교내 대회 다수), 

매주 동아리 운영 준비, 

학교생활기록부 입력, 

학부모 상담,

방과후 수업,

등등등....


실제 수업 준비를 위해 교사가 고민하고, 자료를 찾고, 동료 교사와 협의할 시간은 의도적으로 만들지 않는 이상 갖기가 어렵다. 교사의 더 나은 수업을 위해서 꼭 필요한 시간임에도 늘 더 급하고 결과를 내야 하는 일들 때문에 뒷전으로 밀려난다.




하지만 이런 시간의 중요성을 알고 일과 중 매주 꼭 한 시간을 내어 협의하는 시간을 만든 부장 선생님이 계셨다. 그 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그 외의 많은 업무로부터 단단히 벽을 쌓아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관리자로부터, 많은 선생님들로부터의 합의도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이 시간만큼은 꼭 함께 협의할 수 있도록 하였고 그래서 나는 처음으로 수업 나눔 모임을 해보게 되었다.

 

수업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나누고

서로의 수업을 들여다보며 함께 공부하며

학생의 더 나은 배움에 관해 토의하는 

그런 수업 나눔이었다.


교사가 된 후부터 그때까지 내 수업에 관해 누군가와 고민을 나누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 교사에게 수업은 각자 알아서 해야 하는 그런 고유의 영역 같은 것인 줄 알았다. 처음으로 해 본 수업 나눔 모임을 통해 내 고민을 나누고 다른 선생님의 고민을 듣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었다. 2년을 그렇게 수업 나눔 모임을 하였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나는 계속 수업을 더 공부하게 되었다. 


2년이 지나 그 부장 선생님은 학교를 떠나시게 되었다. 함께 했던 선생님들도 하나 둘 떠나게 되었다. 애를 써서 만든 그 협의 시간이 점점 형식만 남아있게 되었고 그마저도 수많은 업무들에 의해 잠식당해 스르륵 벽이 무너져버렸다. 


나는 다시 외로웠다. 그땐 내가 참 부족하다 생각되어 스스로 그런 수업 나눔을 만들 수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더 많이 공부하고 배웠다. 언젠가 내가 다시 그런 수업 나눔을 열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나도 학교를 옮기게 되었고 하지 못하고 있는 수업 나눔 모임에 대한 갈증은 여전했다. 처음 일 년은 용기도 없었고 선생님들도 잘 알지 못해 시작하지 못했다. 그러고 나서 그 이듬해, 나는 용기를 내어 수업 나눔 모임을 제안했고 정말 감사하게도 9명의 선생님이 신청하셨다. 진심을 다해 모임을 운영하였고 처음엔 어색하던 모임도 점차 자리를 잡아갔다. 다음 해에는 신청한 선생님이 늘어 12명이 되었다. 오후 4시 반쯤에 시작해서 7시, 8시가 될 때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열띤 토론을 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위로가 되었고 서로를 통해 성장해나갔다. 참으로 감사한 시간이었다. 


올해는 나를 포함해 8명이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일상의 수많은 일들은 너무나도 강력해서 빈틈을 파고 들어왔고 우리들의 행복했던 수업 나눔 모임은 결국 버티지 못하고 스르륵 무너져버렸다.




애써 만든 수업 나눔 모임은 

한나절의 햇빛에 녹아버리는 눈사람처럼 

스르륵 녹아 사라져 버렸지만


눈사람을 만들며 행복했던 것처럼

수업 나눔 모임을 하며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내년에 학교로 돌아가더라도 저는

다시 수업 나눔 모임을 만들 겁니다.



*눈사람 그림 : 첫째 딸이 그려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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