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5년의 연애 후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연애를 시작할 때만 해도 우리가 결혼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둘 다 가벼운 만남이라 여기며 시작하게 되었거든요. 남편은 늘 제가 자신의 매력에 푹 빠졌다고 말하고 다니지만 솔직히 말하면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었답니다. 그런데 어떻게 만나게 되었나구요? 글쎄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저는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퇴근 후 하루 저녁에 스케줄을 2가지씩 소화하며 취미생활을 즐기던 사람이었죠. 운동, 악기, 어학 등등 매일을 바쁘게 보내며 지내던 중이라 연애라고 해도 주말에 시간이 되면 잠깐 만나는 정도였죠. 그래서 5년을 연애하였어도 실제 만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답니다. 그게 서로 편했나 봅니다. 각자의 삶을 즐기는 것에 서로 관여하지 않으면서 언제든 연락하여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내편인 사람이 있다는 것이요.
저는 집에서는 장녀라 가족들에게는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에요. 힘든 일이 있어도 부모님이나 동생들에게는 잘 내색하지 않아요. 친구나 동료에게는 더욱더 좋은 모습만 보이려고 노력하고요. 그런 제가 유일하게 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은 남편뿐이에요. 잘하고 좋은 모습만 보여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놓고 못하고 부족한 모습 그대로를 보일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어야 하잖아요? 내가 어리광 부려도 받아주는 사람, 내가 기댈 수 있는 사람, 내가 못한다고 하면 나서서 다 해결해줄 것 같은 사람. 그 유일한 사람이 제 남편입니다.
연애 시절과 달리 결혼 후에는 함께 하는 삶이 많아졌지만 그래도 우리는 최대한 서로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편이에요. 결혼 초에는 남편이 회사에서 이루고 싶은 것들이 많았어요. 공부도 많이 했고요. 저는 뒤늦게 제 일에 열정이 생기면서 최근 몇 년간은 일에 많이 몰두하고 있어요. 저나 남편은 따로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던 것 같아요.
올해 남편은 저를 여러 번 감동시켰어요. 원래 하던 일(대학원, 영어학원, 각종 연구 모임, 공부모임 등등)에 10월부터는 수석 교사 시험 준비까지 더해 엄청 바빴거든요. 평일에 매일 늦게 들어가고 주말에도 공부하러 도서관에 갔어요. 남편은 주말마다 혼자 아이들을 데리고 여기저기를 다녔어요. 자전거도 타러 가고, 등산도 가고, 캠핑도 가고. 외조가 대단하죠? 그러던 중에 봄에 예약해 두었던 제주도 여행이 있었어요. 예약할 때만 해도 수석 교사 시험은 계획에 없던 거였는데 그게 시험 2주 전이 되어 버린 거였어요. 결혼 12년 만에 처음으로 둘이 가려고 계획해 둔 거였는 데다가 한라산 등반부터 가파도 배편까지 너무 많은 것을 예약해 두어서 결국 취소하지 못하고 가기로 결정했죠. 남편은 시험 준비로 힘든 나를 배려해서 혼자 모든 것을 준비했어요. 그리고 제가 충분히 쉬면서 즐길 수 있도록 일정을 정하였어요. 덕분에 한라산 등반도 무사히 마치고 나머지 날은 편안하게 힐링할 수 있었네요.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이렇게 해 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너무 고마웠고 남편이 참 사랑스러워 보였답니다.
하지만 평소의 현실 남편은 집에만 오면 소파와 한 몸이 되어 꼼짝도 안 하고, 먹고 난 간식 쓰레기는 거실 탁자에 버젓이 놓아둡니다. 화장실 등은 맨날 끄는 걸 깜박하고, 티브이에 푹 빠져 내내 티브이를 틀어 놓고 있습니다. 제가 좀 쉴라치면 과일 깎아달라고 하며 저를 귀찮게 하네요. 그럴 때마다 마음속으로 '제주도, 제주도'를 외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