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임 교사 시절에는 내가 아는 지식을 학생들이 잘 이해할 수 있게 간결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좋은 교사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이상을 경험해 본 적이 없어서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님과의 교육학 공부모임 중이었다. 최근 나는 모두가 듣는 가운데 글을 소리 내어 읽는 역할을 맡아, 다른 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읽는 데에 바짝 신경을 쓰고 있었다.
소리 내어 글을 읽다 보면 어디까지가 문장의 주어이고 어떤 서술어가 어떤 것들에 연결되는지, 어디서 쉬어 읽는지 등에 온 감각을 집중하며 읽게 된다. 한 자 한 자를 제대로 읽으며 동시에 문장 전체를 미리 보아야 해서 내 머릿속은 엄청나게 많은 사고를 해야 한다. 또 혼자 눈으로 읽게 되면 빠르게 지나갈 글자와 단어들이 소리 내어 읽으니 각각의 의미에 더욱 집중하게 되고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몇 달을 해오다 보니 혼자 눈으로 읽을 때보다 훨씬 의미 파악이 잘 되고 글의 구조가 잘 보이게 됨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다른 이가 읽을 때에도 내가 읽을 때처럼 인식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 다른 이가 읽는 글을 듣던 중 발음에 내내 신경이 쓰인 단어가 있었다. '계발'과 '개발'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단어의 느낌만을 가지고 나름으로 의미를 이해하며 전혀 신경 쓰지 않았을 터였다. 그런데 이 둘의 발음을 다르게 해야 한다고 신경 쓰다 보니 어떤 곳에서는 '개발'이 쓰여있고 어떤 곳에서는 '계발'이 쓰여 있음이 느껴지게 되었다. 그래서 빠르게 다시 앞으로 넘겨가며 두 단어가 쓰인 곳들을 모두 표시해 보았다. 그렇게 표시를 하고 보니 이 둘을 어떻게 구분해야 할지 더 어려워졌다. 내가 알고 있는 의미가 맞는 것인지도 의심스러워졌다. 그래서 결국 이 둘이 어째서 혼동되어 나오게 되는지 교수님께 질문을 하게 되었다.
저도 혼동되어 있어요. 사실.
교수님의 이 첫 대답에 깜짝 놀랐다. 교수님은 말씀을 이어 나가셨다. "마음의 능력이 있다는 것. 이것은 개발하는 겁니까? 계발하는 겁니까? 처음에는 개발을 쓰다가 점차 계발로 바꿔가고 있습니다...(중략).. 나의 무지를 반영해 놓은 겁니다. 정말 그래요. 그 의견은 제가 받아들이고 나중에 또 고칠 때 보겠습니다. 혹시 또 좋은 의견이 있으면 다음에 만날 때 누가 주시면 좋겠는데, 이것을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위치에 있는 사람은 000 선생님인데(저를 말함). 질문을 했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교수님께서 이 글을 쓰기 위해 아주 깊이 고민하시고 단어 하나도 허투루 쓰시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오늘 읽고 있는 이 글도 지난밤을 새워 쓰시고 수정하신 글이었다. 그런데 교수님은 지금 두 단어를 사용하시는 데에 혼동이 있다고 하셨다. 이 글의 원문이 쓰인 맥락의 바탕이 되는 이론에 관해 더 자세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둘 중 어느 것이 더 옳은가를 판단하기 어렵다는 말씀이었다.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단순히 이 두 단어의 의미만을 생각하고 있었구나. 단어를 사용하는 상태자체가 모호할 수 있는 것이구나. 그런데 교수님도 그 부분에서 모호함을 느끼신다고 하다니, 얼마나 깊이 고민하고 생각하면 아직 혼동되고 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르치는 입장에서 학생이 이런 질문을 하였을 때 내가 아직 혼동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설사 혼동된 상태라 하더라도 그렇지 않은 척 말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혼동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신감이다. 충분히 깊이 고민해 보았기 때문에, 누구보다 가장 깊이 생각해 보았음을 자신할 수 있을 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동되고 있다고.'
교수님의 대답으로 인해 나는 그 두 가지 단어가 쓰이는 상황에 대해 더 찾아보고, 교수님께서 모호함을 느끼신다는 지점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가 가장 좋은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에 더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내가 더 공부하고 배우게 됨을 경험하게 되었다.
얼마 전 어떤 선생님과의 수업 대화장면에서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모둠을 구성하여 활동지를 해결해 나가는 활동 수업 이외에 어떤 활동 수업이 있을 수 있나요?'라는 그 선생님의 질문에 무엇이라도 답을 드려야 할 것 같아 이런 활동, 저런 활동의 예를 들어가며 설명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나의 경험이었지 그 선생님의 물음에 어울릴만한 답은 아니었다. 그런 순간에 답을 주려 하기보다 그 선생님이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질문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오늘 교수님의 대답을 들으며 꼭 어떤 답을 주는 것만이 최선은 아님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교사로서 또 수석교사로서 상대를 더 공부하게 하고 배우게 하는 능력은 결국 나의 깊이 있는 공부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내가 많이 알아서 상대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다. 나의 깊이 있는 공부가 뒷받침될 때 진정으로 상대를 배움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이었다. 이는 대상이 학생일 때도 교사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교사가 위대한 교사가 되는 것이었다.
나는 아직 누군가를 배움으로 이끄는 데에 충분히 내공을 갖추지 못했음을, 훨씬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함을 또 한 번 느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