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인(忍) 세 번
삼남매 중 맏딸인 내가 자라오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을 꼽으라면, "니가 누나니까 참아라" "착한 누나가 좀 참아야지" 였다. 화가 나도 참으라고, 억울해도 참으라고, 참는 게 미덕이라고 배웠다.
학교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친구와 다퉜을 땐 왜 말로 하지 않고 소리를 지르냐며 먼저 화를 낸 아이가 야단 맞았다.
선생님도 조용히 참는 아이 편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참는 게 성숙한거라고 배웠고
“참을 인(忍) 자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 며 스스로를 쓰담쓰담했다.
그런데..
회사에 들어와 보니, 참을 인 자 세 번을 쓰면 진짜로...
죽는다.
정확히는 ‘투명인간’이 되어 조직에서 지워진다.
경력직 입사 초기, 그때의 나는 참 모범생 같은 직원이었다. 야근이 싫어도 참았고, 부당한 업무 지시에도 참았고, 회의에서 내 의견과 다른 결정이 나와도 그저 참았다.
‘경력이어도 우리회사에 대해 아직 모르잖아’ 라는 시선이 두려워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게 몇개월이 지났을 무렵 팀장님이 회의 중에 물었다.
“이 건에 대해 다른 의견 있는 사람?”
나는 분명히 더 나은 아이디어가 있었지만 입을 열지 못했다. 그때 나와 같은 직급 최대리가 손을 들었다.
“제 생각엔 이렇게 하는 게 더 효율적일 것 같습니다.”
팀장님의 눈빛이 달라졌다. “오, 좋은데? 그렇게 한 번 해보자.”
그 순간 깨달았다. 내 머릿속에만 담아둔 아이디어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을.
침묵은 미덕이 아니라 ‘부재’일 뿐이라는 것을.
참으면 알아서 챙겨주던 시대는 끝났다
집에서는 참으면 누군가 알아줬다.
심술 부린 동생 때문에 화가 나도 꾹 참으면, 엄마가 알아서 “누나가 많이 양보했네. 착하다”며 쓰다듬어 주셨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부모님은 내 마음을 알아주셨다.
하지만 회사는 다르다.
팀장은 투시 능력자가 아니다. 내가 야근하면서 속으로 ‘이건 부당한 업무 배분이다’라고 생각한다 해도,
말하지 않으면 절대 모른다. 아니, 오히려 “쟤는 별말 없이 잘하네?“라고 생각할 뿐이다.
더 무서운 건, 침묵이 ‘동의’로 해석된다는 점이다.
회의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이견 없음’으로 기록된다. 부당한 대우에 참고만 있으면 ‘괜찮은 거’로 여겨진다. 그런데 그렇게 참다 보면 어느새 ‘이 정도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꼬리표가 붙게된다.
조직에서의 침묵은 겸손이 아니라 존재감 제로의 신호다.
하지만 무턱대고 말하면 진상이 된다.
그렇다고 무조건 말하면 된다는 뜻은 아니다.
‘참지 말고 말하라’는 조언을 곡해해서, 불만을 무작정 쏟아내면 그건 ‘솔직한 사람’이 아니라 ‘진상’이 된다.
부서 후배 경원이란 친구가 그랬었다. 그는 참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이 일 왜 제가 해야 하는데요?”
“이건 좀 이상한 것 같은데요?”
“원래 이렇게 하는 거 맞아요?”
처음엔 ‘오~용감하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팀원들이 하나둘 경원을 피하기 시작했다.
매번 반박하고, 따지고, 불만을 표현하니 함께 일하기 피곤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말해야 하는 게 맞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어떻게’ 말하느냐이다.
말하는 기술: 감정이 아닌 사실과 대안을
회사에서 제대로 말하려면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감정이 아닌 사실을 말한다.
“저 진짜 열받아요!“ 가 아니라
“이번 업무 배분이 A팀은 2건, B팀은 5건으로 편차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감정을 토로하면 ‘투정’이 되지만, 사실을 제시하면 ‘문제 제기’가 된다.
둘째, 비난이 아닌 제안을 한다.
“왜 맨날 저만 시켜요?“가 아니라
“이 업무를 순환제로 바꾸면 팀원들이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제만 지적하면 불평꾼이 되지만, 해결책을 제시하면 문제 해결사가 된다.
셋째, 타이밍을 선택한다.
팀장이 바쁜 월말 결산 기간에 “저 야근 줄이고 싶어요”라고 말하면 당연히 좋은 반응을 기대하기 어렵다.
비교적 여유 있는 시기에, 일대일로 대화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이야기하는 게 현명하다.
말을 꺼내는 것도 기술이다. 무턱대고 쏟아내는 것과, 전략적으로 전달하는 것은 천지 차이다.
침묵의 대가는 생각보다 크다
참고 또 참다가 결국 터지는 사람들을 참 많이 봐왔다.
5년을 참고 참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사표를 던지는 선배. “더 이상 못 참겠다”며 울면서 퇴사하는 동료.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였다. 그동안 단 한 번도 제대로 말해본 적이 없다는 것.
작은 불만을 말하지 않고 쌓아두면, 그건 눈덩이처럼 커진다. 그러다 결국 폭발하면 회사와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이 깨진다.
반대로 그때그때 적절히 말하는 사람은 다르다.
작은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고, 조직과 건강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며, 오래 버틴다.
침묵의 대가는 생각보다 크다.
참는다고 덕이 쌓이는 게 아니라, 스트레스만 쌓일 뿐이다.
말하는 사람이 기회를 얻는다
지금 우리 팀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가만히 앉아서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회의 때마다 의견을 내고, 문제를 발견하면 제안하고, 자기 생각을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이다.
팀장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말하지 않는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역량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반면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눈에 띄고, 중요한 프로젝트에 투입될 기회도 많아진다.
물론 모든 말이 채택되는 건 아니다. 거절당할 때도 있고, 무시당할 때도 있다.
하지만 말하는 연습을 계속하다 보면, 점점 더 설득력 있게 말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침묵하면 안전할 것 같지만, 사실은 가장 위험하다.
조직에서 ‘없는 사람’ 취급받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으니까.
참는 것과 전략적으로 기다리는 것은 다르다
오해는 하지 말자. 무조건 참지 말라는 게 아니다.
때로는 ‘전략적 침묵’이 필요하다.
이제 갓 신입이 모든 회의에서 발언하면 건방진 사람으로 비춰질 수 있다. 상황 파악도 안 된 상태에서 의견을 내면 오히려 역효과다.
진짜 차이는 이것!
참는 것 : 말하고 싶은데 두려워서 못하는 것
전략적으로 기다리는 것 : 더 효과적인 타이밍을 위해 선택적으로 보류하는 것
전자는 수동적 희생이고, 후자는 능동적 선택이다.
지난 회사 생활 햇수를 거듭해가며 깨달았다.
침묵도 전략이 될 수 있지만, 그건 ‘말할 수 있는데 안 하는’ 사람에게만 해당된다는 것을.
말할 용기가 없어서 참는 사람에게 침묵은 그냥 무능력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참는 미덕은 집에 두고 오자
집에서 배운 ‘참을 인’ 세 번은 집에 두고 오자. 회사에서는 ‘말할 언(言)’ 세 번이 필요하다.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면 말한다. (단, 사실과 논리로)
더 나은 방법이 있다면 제안한다. (단, 비난이 아닌 대안으로)
내 의견이 있다면 표현한다. (단, 적절한 타이밍에)
참고 참다가 폭발하는 사람도,
무턱대고 쏟아내는 사람도 되지 말자.
필요한 순간에 정확하게 말할 줄 아는 당신이기를 바라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