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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냇물 Jun 06. 2022

해마다 유월이면

전우와 조국을 진정으로 사랑한 군인

지난주 속초시청에서 안내 서신이 왔다. 다음 주 현충일 행사계획과 교통편의 제공 안내, 근조 리본이 동봉되었다. 국가유공자인 나에게 배려를 해준 것 같아 무척 감사했으나 부득이한 개인 사정으로 참석이 어려움을 미안한 마음으로 전했다. 


나는 붉은 장미 흐드러지게 피는 현충일이 되면 서울 현충원에 가곤 한다. 그 이유는 내 브런치 데뷰작인 '큰 눈의 추억'에 언급된 ㅇㅇㅇ 전우와 몇 분의 동기생들이 그곳에 계시기에 동기회가 주관하는 추념식에 참석하기 때문이다. 올해는 어려울 것 같다. 


그 외에도 이러저러한 연유로 서울현충원에 다녀올 때면 언제나 마음이 착잡하고 평온하지만 또 다른 특별한 감정이 있다. 그것은 충혼탑을 지나 전우들을 만나는 충혼당으로 가는 왼편으로 유난히 조화가 많이 보이는 한 군인의 무덤 때문이다.


한국전쟁 후 군인묘지로 출발한 서울현충원은 대한민국의 국립묘지로 군인들이 주로 안장되나 국가원수는 물론 애국지사, 국가유공자, 경찰 등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분들의 주검을 모시고 있다. 그중 군인 묘역은 장군, 장교, 사병묘역으로 신분별로 구분되어 안장되는 데 예외인 분이 한 분 계신다. 바로 채명신 장군이다. 


일제 치하 황해도 곡산에서 태어난 채명신은 조선경비사관학교 (육군사관학교의 전신) 5기로 임관한 뒤 한국전쟁 발발 시 대대장으로 참전하였고, 북진 후 후퇴 시 고립된 연대장을 구하기 위해 특공대 50명을 편성하여 작전을 수행한 것이 계기가 되어, 육군 최초 특수부대인 '백골병단'의 지휘관이 되어서 북한군 점령지역에서 후방교란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바가 있다.

1965년 4월 채명신 장군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불려 갔다. 박 대통령이 월남전 전투부대 파병에 대한 의견을 물었을 때 그는 서슴없이 반대의견을 피력했으나, 정부는 혈맹 미국의 간곡한 요청과 주한미군 철수 압력 등에 어쩔 수 없이 파병을 결정하였고, 박 대통령은 초대 주월 한국군사령관 겸 맹호부대장으로 군내에 대비 정규전 최고의 전문가인 채 장군을 임명했다. 

'전쟁을 원하지 않지만 피할 수 없다면 최선을 다해 이겨야 한다!'는 신념으로 4년간 헌신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며 한국군의 위상을 제고시켰다. 특히 게릴라전의 전문가인 그의 용병술은 뛰어났다.


미군이 수색 및 격멸 개념에 입각한 정규전 방식으로 작전을 수행하여 적과 압도적 전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전쟁 내내 고전을 치렀으나, 한국군은 주민과 베트콩을 분리해 격멸하는 전술로 성공적인 임무수행을 하여 세계 군사 전문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중대 전술기지'는 그 전술을 상징하는 곳으로 월남전을 경험한 군인은 모두 기억할 것이다. 월맹의 지도자 호찌민으로부터 '한국군은 만나면 피하라!'라는 지시가 내려올 정도로 적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국민의 신뢰도 대단했다. 1969년 귀국 후 2군 사령관에 보임되었으나 대중적 인기가 높아져 이를 시기하는 세력의 음해에 시달리기도 했다. 3년 뒤 중장으로 군복을 벗었다. 1972년 장기집권을 꾀하려는 박 대통령에게 반대의견을 표출해 대장 진급에 실패했다는 말도 나돌기도 했다.


예편 후 전우들과 허물없이 만나며 참전 장병들의 처우개선을 위해 발 벗고 나서기도 했다. 채 장군은 2013년 11월 25일 87세 생일을 이틀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나를 파월장병들이 묻혀있는 묘역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2013년 11월 28일 서울현충원에서 열린 그의 영결식에는 6.25와 베트남전 참전 장병들이 빽빽이 모여 묘역 일대가 추모행렬로 장관을 이뤘다. 베트남전 위문을 많이 했던 가수 패티김은 "내 영혼이 은총을 입어"라고 구슬프게 조가를 부르고, 군복 입은 후배들은 물론 머리가 허연 노병들이 줄줄이 고인의 영정 앞에 거수경례를 했다. 베트남전의 영웅에게 보내는 마지막 경례였다.


그는 서울현충원 정문을 들어서서 정면의 충혼탑 오른편에 파월장병 묘역인 2 묘역에 안장되었는 데 다른 병사들의 묘지와 같이 크기의 공간과 비석이 설치되어 함께 묻혀 있다. 국립현충원 역사상 장군이 사병묘역에 묻힌 최초의 일이다. 지금도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부하, 후배들의 추모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 진정으로 전우와 조국을 사랑했던 군인이었다.

무와 절망이 최승자 시인의 운명이라면 조국과 전우가 그의 운명이었. 평생을 나라를 지키고 빛냈으며, 마지막까지 전우와 영원히 함께하신 참군인이었다.'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라고 하지만 이분은 영원 살아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쟁이나 전투를 경험하지 않고 만기 전역을 한  입장에서 존경스럽고 감사하며 부럽기도 하. 이제 해와 달이 지켜주는 동작동 언덕에서 편히 영면하소서!


*** 2020년 이후에는 장군, 장교, 사병으로  신분 구역을 따로 두지 않고 사망 순서에 따라 순차적으로 1평 크기로 안장을 하고 있으며, 경기도 연천에 세 번째 국립묘지를 조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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