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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냇물 Jul 24. 2023

홍유릉 사연

조선왕릉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우리 민족의 소중한 자산이다.      


왕릉은 군왕의 당일 행차 가능거리를 고려하여 궁에서 100리(40km) 이내에 선정했다고 한다. 강원도 영월의 장릉(단종), 경기도 여주의 영릉(세종)을 제외하고 모두 한양(서울) 외곽지역에 위치한다.      


종묘를 중심으로 동으로 동구릉, 서는 서오릉, 남은 선정릉, 북은 정릉 등이 각각의 사연을 지닌 채로 세월을 버텨내며 반만년 역사를 이어주고 있다.      


특히 서세동점의 조선 말기 버겁게 군왕의 직을 수행했었던 고종, 순종의 주검을 모신 홍유릉의 사연은 처연하다.


원래 홍릉은 청량리, 유릉은 어린이 대공원이 위치한 광진구 능동에 조성되었으나 남양주 금곡의 현 위치로 옮겨왔다.     

  

청량리의 홍릉은 고종의 부인인 명성황후, 능동의 유릉은 순종의 부인인 순명황후의 능으로, 두 왕 보다 먼저 별세해 조성되어 있었다.      


명성황후 민비는 잘 알다시피 1895년 을미사변 때 일제의 교사를 받은 낭인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되고, 2년 뒤에 청량리 홍릉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조선은 1905년 일제의 식민지가 되고, 강제 퇴위된 고종은 19191덕수궁에서 승하(사망)하였다.    

  

3월초 있을 장례를 준비하는 데 문제가 생겼다. 우리 민족으로서 군왕에 대한 예우로 능호를 정해서 장례를 치러야 하는데 일제가 허락을 해주지 않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사망 시 신분이 조선의 왕이 아니라, 왕공족(일제가 인정한 귀족신분)이라 능호를 붙일 수 없다는 것이다.        


왕족들은 고민 끝에 청량리에 있는 부인인 명성황후능을 금곡으로 옮기서 남편과 합장하며 능호를 함께 쓰는 지혜를 발휘(?)하여 민족의 자존과 왕조의 체통을 유지(?)하였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고종의 독살설로 반일 감정이 높아졌었는 데, 장례식에 전국적 참여열기를 고려하여 민족대표 33인을 중심으로 거사를 준비하였고,  장례일 직전인 31일 일제의 폭압적 지배에 전 민족이 저항한 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3.1 운동은 비폭력 평화시위로 시작되었으나 점차 폭력투쟁으로 바뀌었고, 이 운동은 독립운동사에 커다란 분수령이 되었다.


또한 그의 아들 순종도 1910년 강제퇴위 후 창덕궁에 기거하다 1926 사망하였고 6월에 장례를 치렀다.


홍릉의 사례처럼 능동에 있는 순명황후의 능을 금곡에 부모의 능인 홍릉 옆자리로 이장하며 부부를 합장하는 방식으로...그래서 홍유릉이 조성되었다.


이 장례식 날에도 우리 민족은 일제에 저항하여 6.10 만세운동이 전국 곳곳에 일어났다.     


두 비운의 왕의 죽음은 일제의 무도한 침략에 분연히 저항한 계기가 된 것이다.


그리고 가보신 분을 알겠지만 금곡의 홍유릉은 능 앞의 석물(무인석과 문인석, 각종 동물들의 석상)들이 다른 왕릉에 비해 수가 많고 다양하다. 대한제국이라 황제의 예를 따랐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의 선포는 주변국(, , )으로부터 자주독립 국가임을 상징하는 선언과 상징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약육강식의 시대에 힘없는 나라의 날갯짓이었다. 결국 얼마 안돼서 일제에 주권을 침탈당했다.    



홍유릉 참으로 파란 많은 역사의 현장이다. 다가올 단풍 짙을 어느 날 이곳에 소중한 사람과 역사산책 한번 하시길 권합니다.


#남양주 금곡동 #명성황후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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