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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냇물 Feb 05. 2022

마사이족 대추장이 된 어떤 한국인

어떤 한국인이 마사이족의 대추장이 되었다. 그분의 이름을 알고는 있지만 혹시 위명에 손상이 갈까 해서 안 밝힌다.


마사이족은 케냐 중남부와 탄자니아 북부일대에 분포되어 지역단위로 나누어져 유목 활동을 하며 살아가는 종족이다. 그들은 공동생활을 하는 지역단위로 자신들을 대표하는 추장을 뽑아 정신적 지주로 삶고 집단을 대표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나 대추장이란 직위는 없었다. 그런데 어떤 한국인이 대추장이 되었다.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오래전 한국에서 특전사 공수부대에 근무하던 한 군인(중사)이 있었다. 공수부대에서의 생활은 거칠고 힘들었다. 그는 이것을 보상받으려고 퇴근하면 폭음을 하고 젊은 혈기에 툭하면 싸움질을 했다. 희망이 없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중 또 사고를 치고... 도망가듯이 정선의 탄광 막장에 탄부로 취직을 했다.     

 

거기서도 매일 술로 시간을 보내고 주변 사람들에게 행패도 부리고 싸움질도 하였다. 또 한바탕 싸움 끝에 크게 다쳐서 탄광부근의 병원에 입원을 했다. 인생 막장까지 온 것이다.      


그러데 그는 거기서 천사를 만났다. 젊은 간호사인 천사가 그를 극진히 치료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교제를 시작했다. 그 천사는 이 사람의 진면목에 진실성을 느끼고 그를 설득시켜 신학대학에 보냈다.

     

거기서 주님을 만나고 신학대학을 졸업하여 전도사가 된 이 사람은 이 세상 가장 험한 오지에, 전도하기 힘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역을 하기로 마음먹고 그 대상지를 찾았다.      


마침내 그는 아프리카 적도 부근의 오지 가장 터프한 종족인 마사이족들이 사는 탄자니아 국경부근의 케냐 남부지역으로 천사와 함께 파송되었다. 킬리만자로산이 멀리 보이는 곳이었다.     


큰 키에 강인한 인상, 붉은 색조의 복장을 한 마사이족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사나운 종족으로 알려져 있다. 유목생활을 하며 토테미즘을 신앙으로 하고 있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지난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그들의 전통 언어인 마(MAA)나 지역 공통어인 스와힐리어를 모르기 때문에 더 어려웠다. 목숨까지 협박받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 군인정신으로 포기하지 않고 그들을 만나고 설득했다.    

  

여자들과 어린애들은 설득이 어렵지 않았으나 남자들이 어려웠다. 남존여비와 적자생존의 가치관이 지배하는 유목생활을 하는 종족이라 더 그랬다. 남자들은 자신들의 권위가 손상되는 데 대해서도 내심 강한 저항의식도 있었다.        


호응이 없으면 또다시 만나 설득하고 설득을 했다. 하루는 또 찾아 설득을 하자 묵묵히 있던 한 종족의 우두머리 마사이가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아 이제 끝났구나! 이젠 죽었구나!라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를 둘러싸고 있던 주변의 마사이들의 얼굴 표정이 밝아졌다. 그 이유는 마사이들은 대화 상대방의 얼굴에 침을 뱉는 행위는 그를 친구로 인정하고 호의를 베푸는 그들의 행동이었기 때문이었다.(물이 귀한 마사이들이 자신의 침, 즉 제한된 수분을 나누어 준다는 의미)       

   

이렇게 해서 중요한 고비를 넘긴 그는 본격적으로 선교를 시작했다. 마사이족 거주지 별로 다니며 예수님을 알리고 복음을 전파했다. 점차 신도가 늘어나며 그들이 예배를 볼 장소가 필요했다. 브록 한 개 없는 곳이라 예배당을 만드는 일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복음 전파와 함께 미래의 주인공에게 교육을 시키는 것도 소중한 사명이었다. 그에게 교회와 학교를 만드는 게 당면한 최고의 소명이었다.     

 

천사 부인과 맨몸으로 시작한 사명은 조금씩 조금씩 진척되었다. 한국이 몇몇 교회와 후원자들의 지원이 큰 힘이 되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력한 결과 마사이족 곳곳으로 그 기운이 서서히 퍼졌다. 성전과 학교가 세워지고 마사이들도 점점 변해갔다.   

   

그는 마사이족 거주 중간지역에 선교센터를 마련하고 학교와 교회의 정상적 운용이 되도록 순회하면서 지원과 교육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힘들지만 변화하는 그들을 보는 것이 행복이었다.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이룬 성과는 30여 개의 교회와 초등학교, 10여 개의 중학교, 4개의 고등전문학교가 만들어지는 기적이었다. 교회나 교실에서 만나는 마사이 어린이들의 눈빛이 그렇게 초롱초롱할 수가 없었다.   

마사이족들은 존경과 감사의 의미로 그를 대추장으로 추대했다. 영광스럽지만 무거운 자리였다. 그도 자신의 묏자리를 선교센타 부근에 준비하였다. 자신의 남은 일생을 그들과 보내겠다는 의지로 화답한 것이다.  

   

이 스토리는 선교 여행단에 끼여서 그분에게 직접 듣고 현장을 본 기억을 더듬어 쓴 글이다. 몇 해 전 강릉 출신 친한 친구 자녀의 결혼식장에서 우연히 그분을 만났다. 몇 년마다 한국교회에 업무협조와 건강검진차 귀국하는데 오늘 친한 친구의 혼사라 참석했다고 한다. 강릉에서 고등학교를 나오신 분이었다. 그때 어수선한 결혼식장이라 오래 안부를 묻고 이야기를 할 수 없었던 게 너무 아쉬웠다.     

 

그 후로 교회에 관계하는 분에게 확인 결과 지금도 열심히 선교사업을 하시고 마사이족들의 자립능력을 갖추는데 열정을 바치고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금은 인원수가 많은 케냐 지역만 관리하고 탄자니아 지역은 다른 분이 맡아서 하신다고 한다. 국경통제가 강화된 탓이다.      


군인정신으로 무장된 선교사가 이역만리 오지에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파하여 역사를 이룬 것이다. 존경받아야 마땅할 일이라 생각되어 그 기적의 역정을 부족한 글로 남긴다. 참고로 나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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