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적지역이라 인적이 뜸해서인지, 자연이 살아 있는 이 산은 향로봉과 함께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908m라 하나 바닷가라 상대적으로 매우 높고, 체감으로도 그렇다.
나의 임관 후 첫 보직이 이 산꼭대기에 있는 소초장이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군대생활을 했다는 노무현 벙커도 내 책임구역 내에 있었다. 워낙 고지가 험하기도 하지만 철책을 담당하는지라 산에서 내려올 기회는 아예 없었다.
단 한 번! 가까웠던 동기생이 폭설 때문에 사망했을 때 장례에 참석하러 갔었는데 그 장소가 산 아래 건봉사 바로 옆의 대대본부였다. 그 사연은 브런치 데뷔작인 ‘큰 눈의 추억’에 밝혀 놓았다.
건봉산은 유난히 바람이 세다. 산 중턱에 중대급 선점(先占) 부대가 있었는데 그곳이 특히 심했다. 짚차가 날아갈 정도로 바람이 세다 해서 ‘짚차 바람’이라 불렀다. 지금 생각해보니 양간지풍이다.
그 추억의 건봉산을 다시 찾았다. 접적지역이라 산은 오를 수는 없고 건봉사로 향했다. 그때는 절이 민통선 내라 민간인들의 출입이 어려운 시기였으나 그 뒤로 조정돼서 자유로이 출입이 가능한데기억이 아스라하다!
건봉산에 건봉사! 산 이름이 먼저였을까? 절 이름이 먼저였을까? 궁금해서 확인을 해보니 조선시대 여러 지리지와 고지도에 건봉산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고, 건봉사에 대한 기록만 보이는 것을 보면 건봉사가 먼저인가 보다.
건봉(乾鳳)은 ‘고개에 큰 돌이 봉황이 나는 모양과 같다’는 절 창건자의 말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건봉의 '건(乾)'은 주역 64괘의 머릿괘로 ‘강건하다, 견고하다’의 의미가 있는 말이고 봉은 봉황이라, 절 이름으론 너무 화려한 느낌인데 이렇게 작명한 깊은 뜻은 잘 모르겠다.
또한 이 절은 신라 중엽(520년)에 창건된 고찰이며 창건 당시 원각사라 불리다 고려 공민왕 때 건봉사로 개칭되었다고도 한다. 창건자의 작명 사연과 공민왕 때 개칭 사연이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오래전 옛날 사연이 전해지는 게... 좀 그렇다.
건봉사는 석가모니 치아 사리를 모시는 적멸보궁으로 조선 4대 사찰로 꼽혔고, 한국전쟁 전까지는 조계종 31 본산의 하나로 금강산, 설악산 일대 9개의 말사를 관장하는 절이었다. 절 입구 일주문에 금강산 건봉사라 한 이유였다. 현재는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이다.
전쟁 당시 거의(642칸) 전소되었으나 온전했던 것은 불이문과 대웅전으로 가는 운치 있는 능파교와 돌기둥 두 개다. 최근 복원사업이 활발하게 진행 중이며 국가 사적으로 지정도 추진중이다.
이 절은 사명대사가 의병을 일으키고 조련시킨 곳이며, 그 규모가 6천 여명이나 되어 절 앞 냇가가 쌀뜨물로 하얗게 뒤덮였었으며, 훈련하면서 먹고 씻었다는 냉천약수 일명 장군 샘이 남아 있다.
만해 한용훈 선생도 백담사에서 출가 후 이 절에서 한 때 용맹 정진하였다는 이력을 보면 이 절은 예사롭지 않은 절인가 보다.그분의 흔적을 돌아보려 했으나 기념관 문이 굳게 닫혀있어서 아쉬웠으나 입구의 시비에 적혀있는 예쁜 시 한 수 감상하고 발길을 돌렸다.
시제가 ‘사랑하는 까닭’인데 ‘이 시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니야?’라고 아내에게 묻자 헌신적인 사랑을 노래했는데 뭐가 문제냐고 반문을 한다. 감성이 부족한 내 마음을 들켜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