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상담 이야기
고독사는 긴 세월에 걸쳐 형성된 삶의 구조가 생의 마지막에 드러나는 사건이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 죽을 수밖에 없다는 보편적 조건을 갖지만, 우리가 말하는 고독사는 단순히 ‘혼자 죽는다’는 차원을 넘어선다. 그것은 관계의 단절이 축적되고, 외로움이 방치되며, 결국 사회와 개인이 서로를 더 이상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도달하는 결론이다. 이 죽음은 그래서 개인의 것이면서 동시에 사회의 것이다.
고독사의 무게는 그것이 발견되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누군가의 부재가 즉각적으로 인식되지 않고 냄새나 우연한 방문으로 드러나는 죽음. 이는 곧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에도 이미 사회적 죽음을 경험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죽음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 삶 또한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고독사는 결국 ‘죽음을 맞이한 순간’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이미 지속되던 침묵과 방치를 상징한다.
고독사는 노년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젊은 세대도, 중년의 세대도, 가족이 있든 없든 누구나 고독사의 그림자 속에 있다. 그것은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구조, 사회적 연결망의 방식, 그리고 인간이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머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립되어 있다는 점은 고독사가 외로움과 단절의 축적된 결과임을 보여준다. 우리는 죽음의 순간까지도 누군가가 나를 바라봐주기를, 누군가가 내 마지막 순간을 알아 주기를 원한다.
그렇기에 고독사는 피해야 할 공포에서 성찰의 기회가 된다. 나는 왜 그렇게 타인의 보살핌을 갈망하는가, 그렇다면 반대로 나는 어떻게 타인의 고독에 응답할 수 있는가. 고독사의 두려움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두려움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서로에게 다가가고, 서로를 잊지 않으려는 윤리적 태도를 요청한다. 두려움은 그래서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관계를 다시 묻는 물음이다.
이렇듯 고독사는 사회 문제나 통계적 현상으로 정의할 수 없다. 고독사는 생물학적 종결에 더해, 관계의 단절과 망각에 대한 불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혼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무관심 속에서 방치 될 것인가, 아니면 기억과 애도의 맥락 속에 머물 것인가? 고독사는 바로 이 차이를 질문한다. 그리고 그 물음은 "인간이 서로를 어떻게 돌볼 수 있는가" 라는 근원적인 문제로 우리를 데려간다. 결국 고독사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