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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라는 따뜻한 거짓말

감성 에세이

한겨울 흰 눈은 늦은 새벽의 카톡처럼 불쑥 찾아와. "잘 지내?"라는 옛 여자친구의 메시지처럼 준비도 안 된 심장을 쿵 두드리며 모든 걸 하얗게 뒤덮어 버리지. 문제는 이 바쁜 도시가 갑작스러운 고백을 그다지 반기지 않는다는 거야. 출근길 교통은 카오스가 되고, 도로는 아이스 링크로 변신하며, 신발은 엉망진창이 돼.


하지만 이게 눈이란 놈의 매력이야. 귀찮고, 짜증나고, 불편한데 어째서인지 마음은 포근해지는 거. 눈은 겨울이 주는 최고의 거짓말이거든. 각박한 도시가 잠시나마 동화 속 마을처럼 보이게 하는. 그런데 말야, 웃긴 건 우리 모두가 이 사기에 기꺼이 동참한다는 거야.


눈 덮인 도시는 인스타그램 같아. '현실 가리기' 필터를 하나 얹은 거지. 깨진 아스팔트도, 낙서 투성이 벽도, 아침에 엎질러서 궁시렁거렸던 길가의 아메리카노 자국도 전부 하얗게 지워져. 세상에, 도시가 이렇게 감성적일 수 있다니. 눈은 우리에게 속삭이는 것 같아.


"야, 잠깐이라도 좀 쉬어가. 내가 전부 가려줄게."


알아. 임시방편이란 거. 곧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거야. 내일이면 눈은 녹아 내리고, 그 아래 숨겨진 지저분한 현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낼 테지. 이건 우리네 인생이랑 닮았어. 가끔 모든 게 새하얘지는 순간이 있어도, 결국엔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잖아.


그래도 난 눈을 기다려. 참 아이러니하지. 나이가 들수록, 통장 잔고의 압박이 심해질수록, 책임감이란 게 어깨를 누를수록, 이런 일시적인 마법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니까.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을 보고 있으면 옛 생각이 나. 눈싸움하다가 맞은 뒤통수의 얼얼함, 반쯤 망한 눈사람, 그리고 감기 걸릴 걱정도 없이 미친 듯이 뛰어다녔던 그 순간들.


지금은 뭐, "어른이라서……"란 핑계를 대지만, 솔직히 말해봐. 하얀 눈밭을 보면 여전히 발자국을 내고 싶지 않아? 눈덩이를 굴리고, 못생긴 눈사람을 만들면서 키득거리고 싶지 않냐고. 첫눈이 그런 거야. 아무리 시크하고 쿨한 척해도, 마음 한구석에 숨어있는 순수한 놈을 깨워버리는.


흰눈은 '잠깐만' 버튼 같아. 정신없이 달리던 세상이 갑자기 느려지고, 사람들은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들고 그 순간을 음미해. 아이들은 방방 뛰고, 연인들은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손을 잡고 걸어가. 카카오톡 알림도, 골치 아픈 업무도, 밀린 집안일도 잠시 서랍 속에 넣어두는 거지.


눈은 우리가 애써 무시했던 것들과 마주치게 해. 그게 우리 자신일 수도 있고, 옆에 있는 누군가일 수도 있지. 너무 앞만 보고 달리느라 못 본 것들 말이야. 어쩌면, 눈은 그래서 오는 걸지도 몰라.


물론 이 마법은 오래가지 않아. 눈은 녹고, 도시는 다시 회색빛 일상이 될 테지. 하지만 괜찮아. 중요한 건 그 순간, 우리가 잠시 멈춰 서서 하늘을 올려다봤다는 거야. 도시가 얼마나 빠르게 흘러가든, 삶이 얼마나 고단하든 우리가 웃었다는 거. 그 웃음이 우릴 다시 걷게 만드는 거니까.


눈은 거짓말이야. '하얀 거짓말'이란 말도 아마 여기서 나왔을 거야. 근데 이건 좋은 거짓말이야. 이 거짓말 덕분에 우리는 잠시 숨을 고르고, 하늘을 보고, 옆 사람과 미소를 나눠. 눈은 녹겠지. 현실은 여전히 차가울 거야. 하지만 그걸로 충분해. 삶이란 게 그런 순간들이 모여 만들어지는 거 아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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