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림짐작과 확증편향

의식의 흐름대로 TMT (어쩌면 폴리포니)

by 을룡


일하는 어머니 슬하에 자란 외동딸에게 친구는 책이었다. 유일하진 않지만 가장 의미 있는 친구. 국민학교 2학년 즈음부터 6학년까지 거의 매달 학교 도서관에 '이달의 독서왕'으로 기록되곤 했다. 평일엔 동네책방 칸막이 중 하나가, 주말엔 교보문고 서가 앞 카페트 바닥이 지정석이었고 반나절이나 한나절쯤 나타나지 않으면 엄마는 나를 거기서 찾았다. 나는 글을 통해 세상을, 사람을 배웠다.


글과 세상의 간극은 자주 나를 불편하게 했다. 모든 사람의 내면에는 하위 인격, 곧 과거 자기의 일면이 현재까지 남아있다는 구스타프 융의 개념에 입각해보면, 나의 완벽주의와 경미한 강박은 성장 과정에서 글과 세상의 간극을 좁히려는, 인식과 현실의 불일치를 제거하려는 시도로서 계발된 게 아닐까 싶다.


여러 종류의 글 중에서도 내가 가장 천착했던 건 '소설'이었다. 소설은 지금도 종종 내 도피처가 되곤 하는데, 예를 들어 미야베 미유키의 스릴러나 김유정의 <종의 기원> 같은 책들을 읽고 나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또라이질량보존의법칙 의 누군가 정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현실이 버거울 때 가르시아 마르케스나 천명관,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 , 판타지 소설 따위를 집히는 대로 읽어치우다 보면 어느덧 세상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 없다고 느껴진다.)


어려서부터 소설로 배워 온 (개별) 사람을, 지금은 사회과학을 통해 공중(public)으로 배우고 있다. 더 정확히는, 배운 것들을 확인하는 중이다. 논문을 쓰고 싶었던 것 역시 (사람들은 말을 듣기 싫어하므로) 내가 배운 것들을 수사적 표현이 아닌 숫자, 즉 양적연구의 결과로 설명해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구체적으로는 대니얼 카너먼의 #시스템1 개념을 비롯해 #어림짐작(heuristic) #자기중심편향(egocentric bias) #확증편향(comfirmation bias)

#인지적 구두쇠(cognitive miser) 개념과 페티와 카치오포의 #정교화가능성모델(elaboration likelihood model) 등에 관심이 많은데,

사실 이 관심은 30대 초반 어느 날, 친구를 기다리던 종각역 반디앤루니스에서 아멜리 노통의 <적의 화장법>을 읽고 20대를 관통했던 하나의 큰 질문에 마침표를 찍게 되면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체감했고 20대 내내 의심했던 그것을 행동경제학의 주창자부터 커뮤니케이션학, 사회심리학 등 수많은 사회과학자들, 심지어 어느 영리한 프랑스 소설가까지 꽤 많은 이들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놀랍고 반가운 일이었다. (깨달음의 내용은 비밀이다. 카톡 찌라시나 한줄요약 댓글처럼 누군가 씹어 먹여주는 짧은 글로는 소화될 수 없는 종류다. 그나마 쉽고 빠르게 얻는 지름길은 <적의 화장법>을 읽는 것이다.)


깨달음은 차치하더라도, 앞서 나열한 개념과 논리들은 현실보다 가상의 세계에서 관계 맺고 그룹 짓는 파편화/네트워크화된 개인들에게서 더욱 뚜렷해지는 여러 현상들을 설명해준다. 종종 홈쇼핑에서 충동구매를 한 후에도 채널을 돌리지 못 하고 내내 그 방송을 보고 있는 나의 기이한 행동 같은 것들도 설명된다.


개인 차원뿐 아니라, 갈수록 격렬해지는 우리 사회의 집단극화나 각종 혐오범죄, 반기업정서까지 이해시켜 주며, 업계에서 떠드는 퍼포먼스 마케팅의 실체가 무엇인지, 소셜미디어 등 플랫폼 뒤에 숨은 이들이 어떻게 우리를 조련하는지도 눈치 채게 해준다. 영악하게도, 나에게는 발견 자체로 놀라웠던 그 비밀을 이용해먹기 위해 벌써 어떤 이들은 아이비리그에 연구소까지 차려 놓고 일종의 엘리트 마피아 집단을 만들고 있기도 하다.


If you're not paying for the product, then you're the product.

It's the gradual, slight, imperceptible change in your own behavior and perception that is the product.



모든 것은 연결된다. 사람과 세상에 대한 어떤 하나의 사고체계, 이해의 프레임을 얻는 것은 오랜 갈증을 해소해준다. 쿤데라의 영향에 따라 말하자면, 무질서 상태가 질서를 갖게 되는 것이다. 어느 바닥까지 해체를 반복한 끝에 얻게 된 이해는 질서를 주고, 질서는 다시 평안을 준다.


커뮤니케이션을 업으로, 또 학업으로 삼기 이전에 나는 이미 소설을 통해 수천 명, 주변인물까지 포함해 어쩌면 수만 명의 사람을 읽었을지 모르겠다.


"이해할 수 없는 것, 이해하지 않아도 될 것

을 이해하는 게 당신의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송 선생은 여러 번 강조해 말하곤 했다.


그러나 또, 최근 새로 만난 친구(책으로 만난. 당연히 그는 나를 모른다.) 프랭크 탤리스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타인의 복잡성을 온전히 이해하는 능력은 성숙의 척도이자 진실하고 의미 있는 관계를 맺는 데 필요한 조건이다."




직업과 말투 때문에 종종 일상적으로 하는 말조차 누군가를 설득하려는 의도를 담은 것으로 오해를 받을 때가 있다. 학부 시절 토론학회부터 시작해 직업으로까지 19년간 설득 커뮤니케이션을 해왔으니 몸에 밴 그 '쪼'를 빼는 것은 이제 불가능할 듯하다. 목소리와 딕션으로 인한 불리를 여러명해봤지만, 어차피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


그러나 의외로 나는, 감히 누군가를 설득할 생각을 잘 품지 않는다. 그냥 내가 (직업적으로는 우리 기업이, 이 단체가) 왜 그러한지 이야기할 뿐이다. 그마저도 매우 많이 생략하여 아주 일부만을 전달하려 하는 편이다.


설득은커녕,

사실 나는 당신에게 우주를 설명조차 할 생각이 없다.

사람들이 얼마나 남의 말을 듣기 싫어하는지 충분히 알고 있다. 그리고 세상 모든 언어를 동원해도, 아무 이격 없이, 노이즈 없이 당신에게 내 우주를 이해시킬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당신의 우주를 함부로 이해할 수 있다 생각지도 않는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건 당신의 수천, 수만 갈래 중에 반 가닥, 수십 조 세포의 한두 개쯤

거라고 짐작해볼 뿐이다.


누군가에 대해, 혹은 스스로에 대해서도

무언가 확언하거나 단정 짓는 것은 그저

(직접이든 간접이든) 경험의 결여를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커뮤니케이션은할수록어렵다

#사람은알수록모른다

#세상에장담할수있는게있다면

#아무것도장담할수없다는것뿐

#의심해야할대상이과연타인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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