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리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비 Jun 19. 2022

나를 궁금해 하는 마음

이슬아의 《부지런한 사랑》을 읽고

부지런한 사랑 / 이슬아 / 문학동네 / 2020



개학 사흘 전, 초등학교 3학년의 나는 부지런히 연필을 놀렸다. 계속 미루던 일기를 이제는 써야 했다. 일기를 썼을 법한 날짜를 대강 골랐고, 달력을 보고 요일을 적었다. 도대체 그날 날씨는 왜 적으라고 하는 건지? 아무리 고민해도 맑았는지 비가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날은 흐리다고 적었다. 본격적으로 날짜 밑의 커다란 빈칸을 적으려니 한숨이 났다. 방학 동안 어디 여행을 갔던 것도 아니고, 도대체 집에서 나는 뭘 했을까? 


도저히 쓸 말이 없을 때는 만만한 책을 몇 권 꺼내와 독서일기를 썼다. 그 당시 나의 독서일기는 아주 일정한 틀에 맞춰져 있었다. 책 내용 요약 다섯 문장에 교훈적인 결말 한 문장. 밀린 일기를 쓸 때는 언제나 지루하고 하품이 나왔다. 담임선생님은 일기 내용과 관계없이 맨 밑에 ‘잘했어요!’라는 코멘트와 사인을 남겼다. 형식적이라는 걸 서로 알고 있었기에, 나도 딱히 최선을 다해 쓰지 않았다. 


.


『부지런한 사랑』은 이슬아 작가의 글방에 관한 에세이다. 10대 후반부터 글쓰기 수업을 들으러 나섰던 그는 이제 글쓰기를 가르친다. 카페 아르바이트와 누드모델 말고 다른 일로 돈을 벌려고 시작한 일이었다. 여수의 형제글방부터 대안학교 학생들을 가르친 청소년 글방, 사오십대 여성들을 대상으로 했던 어른여자 글방과 줌과 소규모로 이루어지는 코로나 시대의 글방까지. 올해로 글쓰기 교사 6년 차에 접어든 그에게도 처음 글쓰기에 매진한 계기가 있었다.


이슬아 작가가 처음으로 글쓰기에 열정을 쏟았던 건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당시 담임선생님은 그의 일기를 꼼꼼하게 읽고 길고 구체적인 피드백을 주었다. 그는 자신에게 처음으로 텍스트로 말을 걸어준 선생님을 웃기겠다는 욕망이 솟아올랐다. 후에 글쓰기 교사를 하면서, 글을 검사하다 균형을 잃지 않았는지 후회하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실수 없이 하는 건 궁금해하는 일뿐’(p.202)이라고 말한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이 그에게 보여줬던 그 다정한 마음 말이다.


.


나에게 만약 이슬아 작가의 담임선생님 같은 분이 계셨다면 어땠을까? 아이 둘을 낳고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기 전까지, 텍스트로 나에게 말을 걸어준 사람은 없었다. 엄마들이 모여 공부하는 카페에서 처음으로 나의 글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을 만났다. 글쓰기 수업을 듣고 동기들과 피드백을 주고받으면서, 함께 읽고 쓰기의 힘을 깨달았다. 정성스럽고 섬세한 피드백은 서로에 관한 관심과 애정에서 비롯되었다.


오늘도 하얗게 텅 빈 모니터에서 커서는 깜박거리고, 내 손가락은 쉬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럴 때는 나를 궁금해하는 마음을 떠올린다. 책을 읽으며 나의 어떤 모습들이 떠올랐을까? 내가 그나마 가장 잘 알고 있고, 별다른 자료조사 없이도 쓸 수 있는 좋은 소재는 나다. 묻어둔 마음과 흩어진 생각들은 책의 메시지와 만나 새로운 글이 된다. 글쓰기 실습생 3년 차인 나도 실수 없이 하는 건 나를 궁금해하는 일뿐이다. 



#이슬아 #문학동네 #이슬아글방 #에세이 #부지런한사랑

매거진의 이전글 누군가는 더 위험하고, 더 아프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