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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 Jun 19. 2022

여성과 자연, 꿈과 연결

반다나 싱의 《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한 여자》를 읽고

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한 여자 / 반다나 싱 / 아작 / 2018



초등학교 때 창비에서 나온 아동용 전집 일부가 집에 있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처럼 열 번 넘게 읽어서 유난히 빛이 바랜 것들이 있었다. 먹구름과 백조 등 어떤 모습으로도 변신하는 제우스, 겨울에는 하데스와 지하세계에 머물러야 하는 페르세포네, 월계수로 변한 다프네와 그녀를 사랑한 아폴론까지. 


하지만 초등학교 때의 나는 몰랐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자주 등장하던 이야기가 진실된 사랑인지, 거짓된 폭력인지. 


“폭력이 사랑으로 변신하는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에서 넘쳐난다. 그런 이야기는 수천 년 동안 전해 내려오면서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는다.”

(p.214, 『당신이 아름답지 않다는 거짓말』, 조이한, 한겨례출판, 2019) 


아트에세이스트 조이한의 책을 읽고 돌이켜보았다. 하데스는 페르세포네를 납치했고, 제우스는 수많은 여성을 강간했다. 다프네를 강간하려다 실패한 아폴론은 집착을 놓지 못하고 월계수를 자신의 상징으로 독점했다. 


유년을 경이로운 마법이 가득한 상상의 세계로 채워주었던 ‘그리스 로마 신화’에게 철저히 배반당한 느낌이었다.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 같았다. 남성 중심적 필터를 걷어내고, 여성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바라보았을 때도 불편함이 없는 이야기를 찾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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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다나 싱의 첫 소설집 『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한 여자』에는 총 열 편의 단편 소설이 실려있다. 작가이자 이론물리학자인 그는 인도 뉴델리에서 나고 자랐다. 딸과 남편의 독려로 SF를 쓰기 시작했으며, 미국에서 물리학 및 지구과학을 학생들을 가르친다. 그는 인도에서 시작해 전 세계로 퍼져나간 여성주의 환경운동인 칩코 운동(*)을 통해 페미니즘을 만났다.


(*) 테니스 라켓 제조회사인 사이먼이 히말라야 산간의 호두나무와 물푸레나무를 벌채해 원목을 생산하려 하자 100여명의 마을 여성들이 나무에 몸을 묶은 채 저항하며 시작된 운동 (책날개 저자소개에서 인용)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한다. 그들을 옭아매는 건 주로 인도의 뿌리 깊은 신분제도인 카스트이다. 카스트 제도에 따라 주어진 규범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행동을 보이면, 바로 ‘부끄러워해야 한다’라며 수치심을 강요당한다. 주인공들은 이 소설집 표지에 서 있는 여인처럼 우주(또는 자연)를 꿈꾼다. 


표제작 「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한 여자」의 카말라는 남편이 은퇴한 이후, 자신이 행성이라고 선언한다. 끊임없이 물에 이끌리는 「갈증」의 수쉴라는 뱀 축제 날 퍼붓던 폭우에 집을 뛰쳐나간다. 「사면체」의 마야는 집에서 정해놓은 약혼자를 따르지 않고, 노부인과 함께 떠난다. “구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위대한 어머니 여신’의 상징”(p.182, 『당신이 아름답지 않다는 거짓말』) 인 뱀, “무한한 생명의 원천”(p.183, 같은 책) 물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야기들이다. 경이로운 자연은 주인공들에게 숨겨진 능력과 새 삶을 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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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다나 싱 작가는 ‘허기와 갈증으로 휘청거리는 이 세상에서, 사랑만이 유일한 현실은 아니며, 또 다른 진실들이 존재한다.’(p.120, 사히르 루디안비, 인도시인)고 말한다. 그는 누구도 폭력이나 권력으로 누르지 않고,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자연에서 그 답을 찾는다. 카스트 제도가 억눌러왔던 여성들의 꿈은 하늘로 떠오르고 물속으로 헤엄쳐 들어가 실현된다.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기도 한다. 「허기」의 디브야는 자신의 불행을 통해 타인의 허기를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을 얻는다. 「다락방」의 우르밀라는 조각가와의 만남으로, 우기가 ‘세상들 사이에 존재하는 벽이 허물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p.338)을 열어준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폭력을 사랑이라 우겼던 옛 신화를 내 안에서 비워내자, 행성과 마법 그리고 뱀으로 변한 여성들처럼 불가능한 것들로 가득 찬 SF가 찾아왔다. 재미있지만 결코 실속 없이 허황되지는 않게, 때로는 묵직하지만 여전히 사랑스러운 열 편의 단편 소설. 나는 이제 기쁨과 공포, 경이와 신비를 여성들의 환상적인 이야기에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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