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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 Jun 23. 2022

친절함으로 당신에게 충전을

정세랑의 《보건교사 안은영》을 읽고

(대체텍스트) 오른쪽에 노란 꽃이 핀 화단 옆에서 책을 들고 찍은 사진이다. 책을 들고 있는 나의 분홍색 꽃무늬 치마와 까만색 샌들이 흐릿하게 배경으로 보인다. 책 표지 그림에는 온통 형광빛을 띤 마법 도구들이 놓여 있다. 주인공 은영이 악령을 퇴치하고 충전을 하는데 도움을 주는 물건들이다. 십자가, 묵주, 비비탄 총, 플라스틱 칼, 약병, 붓, 알약 등이다. 




#보건교사안은영 #정세랑 


보건교사 안은영 / 정세랑 / 민음사 / 2015


친절함 만으로 세상이 굴러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나는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차피 언젠가는 지게 되어 있어요. 친절한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을 어떻게 계속 이겨요. (...) 안 되겠다 싶으면 도망칩시다. 나중에 다시 어떻게든 하면 될 거예요."(p.271)


그래서 냉정하게 이야기하는 인표의 말에 한 순간 마음이 동했다. 그래, 1보 후퇴는 2보 전진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그런데, 인표의 말이 끝나자마자 은영의 마음을 빌어 정세랑 작가가 말한다.


'거짓말이어서, 거짓말처럼 마음이 편해졌다.'(p.271)


거짓말이라고. 나중에 다시 어떻게 할 생각하지 말고, 지금. 친절한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을 계속 이길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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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으로부터,』『피프티피플』그리고『보건교사 안은영』까지, 정세랑 작가는 줄곧 세상에 존재하는 친절과 온기를 그린다. 이 책의 주인공 은영은 친절의 '끝판왕'이다. 본인을 소진해가면서도 대가를 바라지 않고, 플라스틱 칼과 비비탄 총을 들고 끝없이 싸운다. 


'은영은 다른 종류의 보상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가, 어느새부터인가는 보상을 바라는 마음도 버렸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고 해서 자신의 친절함을 버리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은영의 일은 은영이 세상에 보이는 친절에 가까웠다.'(p.123)


은영은 악귀와 악령을 퇴치하고, 자신의 힘을 악용하는 사람은 응징하지만, 사연이 있는 영혼이라면 이야기를 듣고 곁을 내줄 줄 안다. 명랑하고 엉뚱하면서도, 소신 있고 용감한, 아주 매력적이고 멋진 여성 주인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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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서도 은영처럼 대가 없이 타인에게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이 있다. 식당 주인에게 '잘 먹었습니다'라고 인사하는 사람, 길에 떨어진 쓰레기를 줍는 사람, 무거운 짐을 들고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던 노인을 도와주는 사람, 유모차를 한 손으로 잡고 밀기에 지나치게 육중한 문을 아기엄마 대신 잡아주는 사람까지. 


마치 은영이 악령을 물리치고 인표의 손을 잡아 충전을 해야 하듯이, 사람들이 친절을 베푸는 데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인표와 같은 고급 에너지 충전원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친절한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을 계속 이기기 위해, 어떻게 충전을 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순간 고개를 돌려 이 책의 표지를 다시 보았는데, '인표의 수면등'처럼 약간 빛이 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정세랑 작가가 쓰는 소설처럼 희망을 버리지 않는 이야기들이 충전배터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이 충전된 만큼 친절을 베풀면, 그 친절이 가닿은 사람들도 충전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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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전히 친절함 만으로 세상이 굴러갈 수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가 다른 사람의 친절이나 친절이 가득 담긴 이야기로 충전이 되고, 내일 나의 친절로써 누군가를 충전해 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놓지 않기로 했다.




#보건교사안은영 #정세랑 #민음사 #정세랑사랑해요 #안은영사랑해요 #소설추천 #북스타그램 #읽다가지하철역못내릴뻔 #읽다가16층간다는걸18층까지걸어올라감


p.118 설령 태반이 까먹고 일부만이 기억한다 하더라도 그중 한 사람이 언젠가 누군가를 구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런 멀고 희미한 가능성을 헤아리는 일을 좋아했다. 멀미를 할 때 먼 곳을 바라보면 나아지는 것과 비슷한 셈이었다.


p.195 사람보다 다른 것들이 비싸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살아가는 일이 너무나 값없게 느껴졌다.


p.259 광개토대왕비를 흉내 낸 모양에 고전적인 서체로 '성실, 겸손, 인내'라고 쓰여 있었다. 셋을 합하면 결국 '복종'이 아닌가, 은영은 늘 끌끌 혀를 찼었다.


p.278 서로의 흉터에 입을 맞추고 사는 삶은 삶의 다른 나쁜 조건들을 잊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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