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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 May 17. 2023

답을 찾는 게 답이 아닌 것 같기도 한

홍승은의 《관계의 말들》을 읽고

#관계의말들 #홍승은


'함께 또 따로 잘 살기 위해서'. 책 제목 아래 부제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나는 함께,는커녕 따로, 잘 사는 법도 알지 못한다. 이 글은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한ㅡ답을 찾는 게 답이 아닌 것 같기도 한 나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


*


몇 년째 지지부진하게 유지하고 있는 관계가 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예쁘고 상냥한' 이름표 안에 나를 잘 담아두고 있었다. 한 살 더 먹을 때마다 주어진 미션을 깔끔하게 클리어하며 살던 시절이었다. 몇 년 뒤 여러 가지 우연, 아니 어쩌면 필연이었을지도 모르는 글쓰기가 나를 찾아왔다. '글쓰기는 역할 옷이나 이름표 같은 단선적인 정보를 벗고 적극적으로 여러 모습의 나와 관계 맺는 일이다.'(p.17) 내 몸에 붙은 이름표를 바라보았다. 납작한 이름표 안에 내가 부여받은 역할들이 남루하게 펄럭였다. 


이름표를 떼어 망치로 두드렸다. 금속판을 계속 두드려 넓히고 넓히듯, 이름표를 더 크게 크게 만들었다. 그리고 내가 새로 발견한 나의 이름들을 적어 넣었다. 어떨 때 나는 역할로 불리는 것보다, 새로운 이름으로 불렸을 때 더 '나'답다고 느꼈다. 하지만 너는 나의 변화에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예전 이름표도 충분히 잘 어울렸는데, 굳이 그렇게 해야만 해? 원래 별문제 없이 하던 것들이잖아. 그게 그렇게 어려웠어? 


나는 너와 많은 날, 많은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차분하게 나열되던 문장들은 점점 진폭이 커졌다. 천장을 찌를 듯 고함으로 터져 나오기도 하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물의 늪에 빠지기도 했다. 그런 시도를 할 때마다, 나는 아물지 못한 상처에서 조금씩 피가 배어 나오는 기분이 들었다. 너와의 관계에 얼마나 많은 의미를 두고 있었던 건지. 나는 내 이름이 이렇게 다양해질 수도 있다는걸, 그저 내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랐는데. 


어떻게 해도 상처가 아물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이름표에 있는 이름 하나를 애써 문질러 희미하게 만들었다. 우리가 그려왔던 선이 맞닿을 수 있도록, 내가 그리던 선을 힘껏 너를 향해 구부렸다. '나를 원하는 눈빛과 스킨십에 모든 의미를 기대'(p.117) 보고도 싶었다. 너는 무척 기뻐했다. 나는 그때 너에게 애써줘서 고맙다는 말이 듣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의 노력에 너는 그렇게 답했다. 나도 바뀌려고 노력했다고. 너만 그런 거 아니라고. 그 말을 듣고 나는 상처 안쪽에서 핏덩어리가 울컥 솟아 나오는 걸 보았다.


버지니아 울프는 1922년 이렇게 썼다. '나는 이제 누가 칭찬하지 않아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p.29) 그로부터 무려 100년이 넘은 시점에, 나는 칭찬을 들으려다 현실과 처절하게 마주한 건가. 여전히 나는 이 관계 안에서 어떻게 숨을 쉬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너 하나에 나의 '관계의 말들'을 몽땅 헌신할 수는 없다. 금속판을 두드려 넓히면 다시 줄일 수 없듯, 내 이름표도 마찬가지다. 관계를 재정의하는 기나긴 여정의 초반에 서 있는 거라고, 그 길을 걷다 보면 언젠가 뒤돌았을 때 피식 웃을 수 있을 거라고, 믿어 보았다.



#유유 #북스타그램 #서평 #책추천 #페미니즘 #대체텍스트




(대체 텍스트, 사진 설명) 회색 천 위에 책이 왼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놓여 있다. 책 왼쪽과 위에는 하늘색, 초록색, 파란색 유리구슬이 여러 개 놓여 있다. 책 표지는 연보라색이고 초록색, 흰색, 하늘색의 c들이 이리저리 겹쳐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c들이 겹친 부분은 다른 색으로 변했다. 책 표지 상단에는 제목 '관계의 말들'과 부제 '함께 또 따로 잘 살기 위해서'가 있다. 그 아래 저자 '홍승은 지음'이 있다. 책 표지 좌측 하단에는 출판사 로고인 유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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