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리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비 May 17. 2023

나를 도운, 내가 도운 여자들

이혜미의 《여자를 돕는 여자들》을 읽고


#여자를돕는여자들 #이혜미



"그래도 관심 가져줄 때가 좋은 거야."


A는 나긋나긋하고 상냥한 말투로 말했다. 내가 남편과 다툰 이야기로 불을 뿜고 난 후였다. 그녀는 자기 남편이 연예인 외모가 바뀐 건 기가 막히게 알면서, 와이프 머리 모양 바뀐 건 모른다며 입을 삐죽이며 웃었다. 속상한 마음에 흠뻑 젖어 있던 차에, 나는 A의 말을 듣고 그만 같이 웃었다. 


"지금은 많이 서운할 수 있지만, 그런 시기가 지나가는 날이 온다?"


정황상 그녀의 조언은 페미니즘과는 무관해서, 내가 원하는 궁극적인 해결책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나는 그 순간 A가 자기 이야기까지 꺼내며 성큼 내민 다정함에 커다란 위로를 받았다. 


페미니즘 공부 5년 차. 초반에는 여성으로 태어나서 어떻게 페미니즘 공부를 안 할 수 있지?라며, 페미니즘 공부를 안 하는 사람들에게 반감을 가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페미니즘을 텍스트로 배워야만 공감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느낀다. 내가 힘들 때 토닥거려 준 여성들 중에는 페미니즘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여럿 있다. 그녀들은 살면서 사회가 정한 기준이 불합리하다는 걸 깨달았기에 나에게 곁을 줄 수 있었다. 덕분에 나는 페미니즘만이 정답이라 정의 내릴 수는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 없듯이.


쉽게 단순화하는 것에는 난폭함이 스며있다. 여적여라는 말뿐 아니라, 여자라면 반드시 여자를 도와야 한다는 말도 그렇다. 어느 쪽이든 성별을 근거로 여성은 어떠해야 한다는 특정한 틀에 여성을 가둔다. 때문에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녀가 어떤 주장을 하든 편을 들어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여성이라는 이유로 성차별을 겪는 현실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미국 연방 대법원에서조차 남성 대법관이 여성 대법관의 말을 자르거나, 변호사는 대법관이 말하면 즉시 발언을 중단해야 함에도 남성 변호사가 여성 대법관의 말을 끊는 경우가 많아서 새로운 법정 변론 규칙을 시행했다고 하지 않는가.(*) 


여성들 간의 다양성을 잊지 않으면서도, 차별을 받는 여성들이 계속 앞으로 나갈 수 있도록 으쌰 으쌰 힘을 보태고 싶다. 이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일류 여성만 잘 되는 건 평등이 아니'(p.86)다. 최고 중의 최고가 아니더라도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어야 한다. 직면하고 싶은데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쫄지마, 아무것도 아니야."(P.208)라고 웃으며 '그런 여자들이 자신감을 가지고, 자기 안의 잠재력과 활력, 생명력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돕고'(p.138) 싶다.  '연대'라고 거창하게 이름 붙이지 않더라도, 그때 나누는 수다나 공감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지 않을까. '타인에게 공감하고, 우리를 이야기하는 이들의 응집된 힘이야 말로 판을 바꾸는 원동력'(p.193)이 된다.


얼마 전 회사 동료 B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모 차장이 자기랑 점심을 먹자고 하는데, 혹시 같이 먹어줄 수 있냐고. B는 어리고 늘씬하고 예쁘고 싹싹해서, 우연히도(?) 기혼 여부에 관계없이 많은 남자 직원들이 밥을 사주고 싶어 한다. 아무래도 그 차장이 불편해서 둘이 식사를 하고 싶지는 않은 것 같았다. 나도 그가 꺼려졌지만, '후배 여성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마음'(p.256)이 솟아올랐다. A가 내 이야기를 들으며 나에게 기운을 불어넣으려고 애썼던 모습도 떠올랐다. 며칠 뒤 B와 모 차장과 셋이 점심을 먹으러 갔다. 마음에 없는 유쾌함을 장착하느라 고단했지만, B가 덜 불편하다면 다행이었다. 그다음 날, 내 책상에는 '언니, 고마워요.'라고 적은 쪽지와 자그마한 초콜릿이 놓여 있었다. 나는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출처: 유정훈, <여성의 말을 자르는 남성들>, 경향신문, 2023.1.17.



#부키 #여돕여 #여적여 #페미니즘 #인터뷰집 #여성서사 #서평 #북스타그램 #리뷰 #대체텍스트 #책추천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대체 텍스트, 사진 설명) 회색 천 위에 책이 왼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놓여 있다. 책 왼쪽에는 흰색 꽃이  열 송이 정도 나뭇가지에 붙어있다. 책 표지는 까만색이고, 흰 선으로 팔각형이 그려져 있다. 팔각형의 위쪽 두 개 꼭짓점에 각각 인터뷰이의 이름과 제목 중 '여자를'이 있다. 인터뷰이의 이름은 '핫펠트, 김소연, 하미나, 임소연, 김은희, 서한나, 류호정, 전수연, 나임윤경, 한승희'이다. 팔각형 왼쪽 모서리 옆에 '이혜미 인터뷰집'이 있고, 오른쪽 모서리 옆에 제목 중 일부인 '돕는'이 있다. 팔각형 중앙에는 '치열하게 싸우고 다정하게 빛나는'이 있다. 나머지 제목인 '여자들'은 인터뷰이의 이름 아래 거꾸로 쓰여 있다. 저자의 이름과 팔각형은 흰색이고, 나머지 글자는 모두 분홍색이다. 책 표지 하단 중앙에 출판사 로고인 부키가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답을 찾는 게 답이 아닌 것 같기도 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