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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 May 17. 2023

어떤 자서에는 자서로 응답할 수 밖에 없다

장일호의 《슬픔의 방문》을 읽고



#슬픔의방문 #장일호



'어떤 종류의 자서自敍엔 자서로 응답할 수밖에 없다.'(p.183, 《일기》, 황정은)



소설가 황정은은 에세이 《일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록산 게이의 《헝거》를 읽고 리뷰 형식의 글은 쓸 수 없다고 느꼈다. 나에게도 '어떤 종류의 자서'의 목록에 포함된 책들이 있다. 《헝거》 (《일기》에 실린 이 책에 대한 황정은의 글도), 아니 에르노의 《사건》, 홍칼리의 《붉은 선》, 모드 쥘리앵의 《완벽한 아이》, 캐럴라인 냅의 《욕구들》… 이런 책들은 자기를 멋지게 보이려고 포장한 것 같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자신을 감추려고 하는 몸짓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용감하게 자기 삶을 적어낼 수 있다니, 하고 나는 매번 감탄했다.



그리고 《슬픔의 방문》이 목록에 더해졌다. 장일호 기자는 이해하기 어렵고 한없이 혼란스러워지는 상황에 처하면 책을 찾았다. 그는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질문을 들고 책 앞에 서곤 했다. 삶도, 세계도, 타인도, 자기 자신조차도 책에 포개어 읽었다. 책은 그가 들고 온 슬픔이 쉴 자리를 반드시 만들어 주었다.'(p.9) 나는 그가 책과 함께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나아간 궤적을 따라갔다. 그가 권인숙 교수를 보며 '과거가 나를 반드시 망가뜨리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p.90)을 가졌다고 쓴 부분을 읽었다. 나도 과거가 내 삶을 산산조각 낼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이십 대의 나는 사랑이라는 말에 쉽게 약해졌다. 당시 애인은 해외 출장 중이었다. 외롭다고, 자신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몇 번이고 물으며 사진을 보내달라 했다. 내 몸이 나와 있는 사진을 요구했다. 나는 사랑하니까, 사진 정도 보내줘도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 후 1년 넘게 그를 만났다. 그가 나와 연결되고자 하는 마음이 집착 같아 그만 헤어지자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내가 이직 준비 중인 회사에 그 사진을 뿌리겠다고 협박했다. 공갈로 끝났지만, 나는 십 년 넘게 악몽을 꾸었다. 나를 애써 숨기다가, 몇 년 전에야 SNS 프로필에 아이들이나 나의 사진을 올리기 시작했다.



용기 있는 여성들의 글 덕분에 과거의 나를 보듬을 수 있었다. 나만 겪은 일이 아니라는 것.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 협박은 분명히 범죄라는 것. 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어떤 종류의 자서'들은 만나지 않아도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감각하게 해준다. 때로 슬픔은 거대하게 몸을 부풀려 나를 방문한다. 나는 '상처받은 마음을 돌보는 슬픔의 상상력에 기대어 나의 마음에 타인의 자리를 만들'(p.251)어 주는 이런 책들을 곁에 둔다. 그러면 커다란 슬픔도 언젠가 작아지고 희미해질 것을 단단하게 믿게 된다.




#낮은산 #북스타그램 #에세이 #서평 #대체텍스트 #에세이추천



(대체 텍스트, 사진 설명) 회색 천 위에 책이 오른쪽으로 살짝 비스듬히 놓여 있다. 책의 오른쪽 위 공간에 노란 꽃이 중간중간 달린 나뭇가지가 있다. 책 표지는 오렌지색이고, 흑마노 목걸이를 한 쇼트커트를 한 사람이 그려져 있다. 책 표지 상단 중앙에는 책 제목 '슬픔의 방문'이 흰색으로 음각 처리되어 있고, 그 아래 '장일호 에세이'라고 쓰여 있다. 책 표지 하단 중앙에 출판사 로고인 '낮은 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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