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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 May 18. 2023

몽환적으로 달려가는 야간열차

다와다 요코의 《용의자의 야간열차》를 읽고 

#용의자의야간열차 #다와다요코

낯선 냄새가 풍기는 공항에 혼자 내리면, 언제나 불안과 자유가 동시에 찾아왔다. 내가 일상을 살아가는 곳이 아니기에 예상치 못한 일이 닥칠 수 있다는 긴장감. 아무도 나를 모르기에 내가 어떤 모습이 되어도 괜찮을 거라는 해방감. 박카스 병과 커피잔이 어지럽게 굴러다니던 사무실 책상도, 회식이라는 이유로 억지로 웃음 지으며 탬버린을 흔들어야 했던 비좁은 노래방도 다 잊을 수 있었다. 그렇게 타국이라는 새로운 공간에 나는 즐거이 놓였고, 온전히 혼자가 되어 내 주위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다와다 요코의 소설집 《용의자의 야간열차》에서 주인공은 '당신'이다. '당신'은 야간열차를 타며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을 마치 '용의자'를 관찰하듯 바라본다. 진실을 캐려는 적극성은 없다. 그저 그 사람들이 어떤 사연을 가졌을지 옷매무새와 행동을 보고 상상한다. 나는 주로 나의 '용의자'들을 공원과 카페에 앉아 관찰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의 다양한 질감이 귀로 흘러들어왔다. 반려견과 함께 나온 백발의 남성은 누구를 만나러 가는 걸까, 선글라스를 쓰고 힘차게 걸어가는 여자는 회사에 가는 걸까, 음료수를 홀짝거리며 공상에 빠지곤 했다. 



나는 여행지에 소속되어 있지 않음에 기뻤다. 학교-집-회사로 촘촘하게 엮인 현실에서는 끊임없이 나를 검열하고 단속해야 했다. 이십 대 중반의 한국 여성에게 걸맞은 행동거지와 그 나이 즈음에 성취해야 하는 과업들에 나는 항상 옥죄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혼자 외국에 발을 들이면, 나는 역할에서 자유로워졌다. 나는 내가 걷고 싶은 방식대로 몸을 옮겼고, 주위 사람들은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으니 없는 거나 다름없구나'(p.43) 하는 생각에 조금 들떴다. 



소설 속 열차 여행은 조금 더 역동적이다. '당신'은 어디에도 쉬이 머무르지 않고, 파리에서 베오그라그로, 암스테르담에서 '어디에도 없는 마을'로 이동한다. '땅의 이름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침대 밑을 스쳐'(p.140) 지나간다. 이 여행은 묘한 거리감과 불편함을 동반한다. 두 인물이 동일함에도 화자가 주인공을 '당신'이라고 칭하는 까닭에, 나는 '당신'과 화자의 간격에 머뭇거렸다. 등장하는 '용의자'들이 흡혈귀인지 범죄자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함에 혼란스러워지기도 했다. 내가 잠시 깃들었던 여행지의 시공간도 한 편의 꿈같이 흘러갔지만, 다와다 요코가 그린 야간열차는 마치 환상의 경계를 달려가는 것 같았다. 나는 '당신'의 자리에 앉아 발밑에서 덜컹거리는 속도에 몸을 맡겼다.


#문학동네 #소설 #단편소설집 #서평 #북스타그램 #대체텍스트


(대체 텍스트, 사진 설명) 회색 천 위에 책이 왼쪽으로 비스듬히 놓여 있다. 책 왼쪽에는 흰 꽃이 두 송이 있다. 책 표지 상단 좌측에 '세계문학전집 138'이 작게 쓰여 있다. 책 표지는 상단에서 삼분의 일은 열차가 빠르게 지나가고 그 뒤 플랫폼에 서 있는 사람이 그려져 있다. 그 아래 삼분의 이는 까만 바탕에 '多和田葉子: 容疑者の夜行列車'(희고 작은 글자) '다와다 요코'(파랗고 조금 더 큰 글자) '용의자의 야간열차'(희고 더 큰 글자) '이영미 옮김'(파랗고 작은 글자) 이 쓰여 있다. 책 표지 하단 중앙에 문학동네 로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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