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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 May 18. 2023

페미니즘을 놓지 못하는 이유

민혜영의 《여자 공부하는 여자》를 읽고

#여자공부하는여자 #민혜영

페미니즘을 놓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나는 페미니즘에 생각과 말을 많은 부분 빚졌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분노와 좌절이 조금씩 마음속에서 부글거리기 시작했다. 무언가 억울하고 기분이 좋지 않은데, 도무지 내가 왜 그런지 알지 못했다. 뿌연 안갯속에 고인 늪처럼 실체가 분명하지 않았고 그 깊이도 헤아리지 못했다. 페미니즘을 공부하기 전의 나는 불만을 꺼내려다 그저 으앙 하고 울었다. 



우연히 부너미의 샛노란 책 《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를 만났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깨달음이 반짝 섬광처럼 스쳤다. 더 알고 싶다, 배우고 싶다, 어쩌면 이 길을 따라가면 안개가 걷힐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2018년 여름, 나는 6개월 된 둘째를 토닥이며 희망을 품었다. 읽고 쓰면서 책장에 차곡차곡 책이 늘었다. 둘째와 나는 각자의 자리에서 소리를 내고, 음절을 익히고, 문장으로 나아갔다. 



지름길은 없었다. 동굴 천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다 보면 언젠가 석순이 자라는 것처럼,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했다. 페미니즘 책을 읽는 독서 모임에 참여했고, 페미니즘 고전을 텍스트로 삼는 강의를 찾아 들었다. ''무엇'이 행복이고, '누구'의 행복이며, 행복을 위해 '무엇을','어떻게' 합의해야 하는지 같은 것들'(p.60)을 배웠다. 민혜영 작가님이 프롤로그에 적어놓은 이야기처럼, 내 삶의 고민과 의문과 바람을 설명해 줄 언어가 페미니즘에 있음(p.8)을 점점 나도 직감했다. 



페미니즘 공부를 하다 보면 나는 덜 외로워졌다. 하루하루 살기 바빠 단거리 달리기를 하고 있다고 믿었는데, 사실은 마라톤이었다. 나 혼자 뛰는 게 아니라, 나와 비슷한 질문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하나 둘 나타났다. 우리는 책 구절을 목소리로 나누었고, 모임과 강의에서 함께 울고 웃었고, 때로는 근황을 공유하느라 밤을 지새웠다. 스스로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기쁨에 더해, '앎으로써 삶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동료들을 만났다. 



요즘 둘째는 원하는 걸 들어주지 않는다고 벌러덩 누워 울지 않는다. 동그란 눈을 굴리며 또렷한 목소리로 자기주장을 내세운다. 아이가 가장 자주 꺼내는 말은 "왜?"이다. 나도 자주 '왜'에 대해 고민한다. 나는 왜 불쾌한 농담에도 상냥해야 된다고 생각했었는지. 화성남-금성녀라는 단순한 사고방식은 왜 유행해왔는지. 왜 여성 국회의원은 전체의 20%도 되지 않는지.(*) 표준 또는 기본 설정값은 왜 비장애 성인 남성인지. 



최근에는 '왜'에 덧붙여 '어디'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권력이 어디에서 나오기에 이 모든 차별이 가능해지는 걸까, 같은 질문들. 치우친 권력에 대한 이야기는 '어떤 세상을 만들고 싶은가'(p.241)로 이어진다. '나는 주부다'라는 실존(p.241)을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다른 세상을 상상하고 요구하고 행동하는 일. 그 다른 세상의 가능성에서 '행복'은 다른 모습으로 나를 기다린다. 

#웨일북 #북스타그램 #서평 #페미니즘 #페미니즘책 #대체텍스트 #페미니스트도결혼하나요 #기혼페미니스트

(*) 플랫팀, <여성 국회의원, 역대 가장 많이 뽑혔다지만 20%벽도 넘지 못했다>, 경향신문, 2020.04.17.




(대체 텍스트, 사진 설명) 흰 천 위에 책이 왼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놓여 있다. 책 오른쪽에 흰색 꽃이 다섯 송이 정도 뭉쳐 있다. 책 표지는 연한 분홍색이고, 표지 왼쪽 상단에 '앎으로써 삶을 바꾸는 나의 첫 페미니즘 수업'이 있다. 표지 중앙 상단 위에서 아래쪽으로 '여자-공부하는 여자'라고 제목이 있다. 제목 아래에는 여자 둘이 나란히 앉아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표지 우측 상단에는 '민혜영 지음'이 있다. 표지 하단 중앙에 출판사 로고 웨일북이 있다. 사진 왼쪽에서 햇빛이 비쳐서 그림자가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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