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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 May 18. 2023

인간은 소모품이 아니다

은유의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을 읽고

#알지못하는아이의죽음 #은유



그 회사에서 첫 프로젝트에 투입되었을 때 나는 무척 당황했다. 팀장의 간단한 업무 분장이 끝난 후, 다른 팀원들은 바로 일을 시작했다. 조용한 회의실 안에 키보드와 마우스를 딸깍거리는 소리만 자욱했다. 하지만 나는 무엇을,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전혀 몰랐다. 입술이 바싹 마른 채로 회의실에 앉아 이 파일 저 파일을 열어보다 하루를 보냈다. 야근하러 사무실에 들어가는 선배 직원을 따라가, 붙잡고 간절한 눈빛으로 도움을 청했다. 그제야 겨우 내가 어디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설명을 들었다. 나는 하루에 서너 시간씩 자며 일을 해야 맡은 분량을 끝낼 수 있었다. 커피의 쓴 내가 입에 배었고 수많은 박카스 병이 책상에 굴러다녔다. 



내가 견뎌야 했던 건 노트북 앞에서의 수많은 시행착오와 기약 없는 야근이었지만,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에 나오는 특성화고 학생들은 현장 실습에서 목숨을 걸어야 했다. 안전점검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기계 조작법을 간략하게 배우고 바로 업무에 투입되었고, 제대로 된 감독자 없이 베테랑 직원이 할만한 일을 수행했고, 초과 근무를 어쩔 수 없이 견뎠고, 욕설 심지어 폭력 등 비인간적인 대우에 노출되었다. '지하철을 고치다가, 자동차를 만들다가, 뷔페 음식점에서 수프를 끓이다가, 콜센터에서 전화를 받다가, 생수를 포장·운반하다가, 햄을 만들다가, 승강기를 수리하다가'(p.17) '그들은 사고를 당하거나 자기 구제로써 죽음을 택했다.'(p.17)



이렇게 '특정 계층'의 아이들이 계속 노동 현장에 유입되어 희생되는 상황에서, 과연 자기 일에 책임을 다하는 게 정답인 걸까. 누구나 조직에서 '처음'일 때가 있는데, 조직은 그런 약한 사람을 배려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어떨 때는 부모조차도 다 그렇게 사는 거라며 힘들어도 참는 게 인생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나는 김동준 사건 담당 노무사였던 김기배 님의 말처럼, '우리 사회가 조금 더 좋아지려면 여린 사람들을 존중하고 여린 것들을 섬세하게 대할 수 있어야'(p.117) 한다고 생각한다. 존엄한 노동조건이 보장되지 않는 열악한 상황에서, 그저 참는 게 답이라고 말하는 건 폭력으로 느껴진다. 



교과서에도 없고 근로계약서에도 없지만, '자기 일에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자기를 돌보고 지키는 사람이 되는 게 더 중요하다. 힘들면 회사는 가지 않아도 된다. 나를 지키는 게 먼저다.'(p.21) 하지만 직장 경험이 없던 학생들이 자신이 어느 정도를 감내해야 하는지를 잘 알기 어려울 수 있다. 이들이 괴로워하며 고민하지 않도록, 원칙을 지켜야 할 사람이 원칙을 잘 지키도록, '돈 없고 힘없는 사람을 위한 정책'(p.122)이 더 많이 나오면 좋겠다. 언제 어디서든 낮은 지점에 있는 사람을 갈아 넣는 게 당연해지면 안 된다. 인간은 쉽게 버리고 쓰는 소모품이 아니다.




#돌베개 #인터뷰집 #현장실습생 #책추천 #북스타그램 #서평 #대체텍스트


(대체 텍스트, 사진 설명) 아주 연한 노란색 천 위에 책이 왼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놓였다. 책 왼쪽에는 흰 꽃송이가 여러 개 뭉쳐진 상태로 놓여 있다. 사진 왼쪽에서 햇빛이 비쳐서 꽃송이 뭉치와 책 오른쪽으로 그림자가 졌다. 책 표지는 짙은 남색이고, 표지 가운데에서 약간 왼쪽에 세로로 제목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이라고 은색 음각이 되어 있다. 책 표지 중앙에는 위 부분은 짙은 남색, 아랫부분은 분홍색으로 된 노트 사진이 있다. 노트에는 'Be Happy'라고 쓰여 있다. 책 표지 우측 하단에는 세로로 '은유 지음  임진실 사진'이 있고, 제일 오른쪽 밑에 출판사 로고인 돌베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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