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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 May 21. 2023

허기를 해소하려 연애를 끊지 못했다

캐럴라인 냅의 <욕구들>을 읽고


욕구들(여성은 왜 원하는가) / 캐럴라인 냅 / 북하우스 / 2021


#욕구들 #캐럴라인냅



언제나 애인이 필요했다. 대학에 들어가고 결혼하기 전까지, 나는 내가 참여했던 거의 모든 모임에서 애인이 있었다. 동아리, 학회, 친목모임, 소개팅, 동호회, 회사... 모임이 시작되면 이 안에서 누구와 만날 수 있을지 면밀하게 살폈다. 활동하다가 서서히 누군가 좋아지거나, 누가 나한테 먼저 좋다고 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애인이 있는 상태'가 당시 나에게는 몹시 중요했다. 누군가에게 보고 싶다, 사랑하다는 말을 듣는 것. 누군가가 주말에 나와 만날 약속을 최우선으로 잡는 것. 누군가의 애인이라는 위치에 놓이는 것. 그래서 아주 특별한 누군가가 찾아올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건 누군가에게 소속되어 있다는 안정감이었다.



새로운 사람과 애인이 되는 과정은 지난했다. 애인을 빨리 만들려면 '예쁘고 귀여운' 역할을 잘 수행해야 했다. 과하지 않게 화장을 하고, 살이 찌지 않도록 다이어트를 멈추지 않았으며, 이야기를 잘 들어주면서도 눈치를 봐 가며 애교를 떨었고, 적절하게 지갑을 열어 돈을 냈다. '섹시하기 위해서는 섹시하다고 여겨져야 하고, 원해도 된다는 허락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남이 원하는 대상이 되어야 하는'(p.251) 해리의 과정을 나는 열심히 밟아갔다.



연애 초기의 감정이 안정되면, 나는 애인 몰래 결혼을 꿈꿨다. 결혼이란 나에게 궁극의 종착지였다. 새로운 사람을 찾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되고, 온갖 애를 써가며 만들어 낸 '매력'을 어필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나와 잘 맞을 수는 없었다. 의견 차이가 생겼고 다툼이 따라왔다. 그러면 나는 가능한 수준까지 참아보다가 헤어졌다. 반드시 그 사람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그러다 타이밍이 맞아 지금 남편과 결혼했다. 메워질 줄 알았는데,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허기가 있었다. 도대체 나는 왜 혼자 있지를 못하는 걸까? 왜 나는 여전히 채워지지 않았나? 나는 그 많은 애인들과 만나고 헤어지면서 '무엇을 느끼고 있었을까? 무엇을 느끼지 않으려고, 그토록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었던 걸까?'(p.109) 아이를 둘 낳았고, 가족들과 크게 싸웠고, 가장 친했던 친구가 사고로 세상을 떴으며, 여러 차례 번아웃을 겪었다.



우연히 H작가님의 온라인 카페에서 스터디에 참여했다가 마음 맞는 엄마들을 만났다. J작가님이 추천해 주는 책을 따라 읽으며 독서의 세계를 넓혀갔다. S작가님의 글쓰기 수업에서 내 안에 눌려 있던 이야기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웹진을 같이 하는 소중한 동료 라마와 엘라에게 협업과 배려, 지지가 동시에 가능함을 배웠다. E작가님의 글쓰기 수업에 참여해 퀴퀴한 과거의 먼지를 털어내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고 차곡차곡 쌓아온 우연의 순간들이 나의 취향을 형성하고 태도를 만들어냈다. 몇 년이 지나고 나서야 열쇠는 내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걸 알았다. '진짜 몸부림은 나에 관한 것이라고. 나는 진짜 현실 세계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고, 내 몸 안에 존재해야 하며, 내 마음을 알아야 하고, 내 인생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기만 하는 걸 그만둬야 한다고.'(p.362) 애인이나 남편이 아닌, 바로 내가.



그러자 흡족함의 순간들이 찾아왔다. '별안간 몸과 마음과 정신이 나란히 연결되는 순간들이 있고, 마치 우주가 보낸 선물처럼 기대하지 않고 있을 때 찾아오는, 내가 잘 먹여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들이 있다.'(p.370) 나의 행복을 나만큼이나 온전히 축하해 주는 동료이자 친구들, 한없이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해맑게 웃는 아이들의 얼굴, 다른 삶과 내 삶이 이어져 있다는 걸 느낄 때의 연결감, 과거 트라우마들도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는 안전한 공간, 운동을 하면서 조금씩 힘이 차오르는 몸.



아직도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은 외로움, 허기가 나를 압도하는 기분이 들곤 한다. 이성 간의 연애나 결혼 같은 '정상'적인 관계가 내 허기를 해소하는 출구가 될 수 없음을 안다. 나에게는 그보다 더 많은 것들이 있다. 나를 존재하게 만들어 주는 몸, 내가 나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으며 지지 받는 관계들. 그것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찰나의 순간들이 있다. 나는 그런 순간에서 오는 '섬광처럼 스치는 만족감, 얼핏얼핏 희미하게 반짝이는 희망의 빛과 맛'(p.371)을 잊지 않는다.




#북하우스 #책추천 #에세이추천 #서평 #북스타그램 #대체텍스트


(대체 텍스트, 사진 설명) 주름진 흰 천 위에 책이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놓여 있다. 책 오른쪽에는 솔방울이 두 개 있다. 햇빛이 책 표지 중앙을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비추고 있다. 책 표지는 살구색이고, 책 표지 중앙에 제목인 '욕구들' '여성은 왜 원하는가'가 있다. 그 아래 사과가 유리그릇 위에 둥실 떠 있는 그림이 있고, 그림 위쪽에 'Appetites' 아래쪽에 'Why Women Want'가 있다. 그림 밑에 '캐럴라인 냅 지음' '정지인 옮김'이 있다. 책 표지 중앙 맨 아래에는 출판사 로고인 북하우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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