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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 May 22. 2023

부디 당신의 그림자가 솟지 않기를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를 읽고

#백의그림자 #황정은 



얼마 전 친구와 안부를 주고받다가 문득 그가 말했다. 며칠 전에 재계약을 했는데 자기는 성공했지만 절반 넘는 동료들이 계약하지 못했다고 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라 모두 당황했다고. 자기가 업계에서 오래 있어서 아는 사람이 많아 동료들이 이직할 곳을 알아봐 주고 있다고. 그런데 불황이라 그런지 도통 갈 곳을 찾기가 어렵다고.



검고 가는 뿔테안경을 쓴 그가 동글동글한 얼굴에 땀을 흘리며 여기저기 전화를 걸고 있을 장면이 눈에 선했다. 동시에 그가 친하다고 했던 목소리가 카랑카랑한 동료의 아들이 이번에 대학에 갔다고 했던 이야기도 떠올랐다. 구성진 사투리를 쓴다던 다른 동료는 초등학생 쌍둥이가 있다고도 했었는데.



'계약 해지'라는 단어에 누군가의 생계가 딸려오는 것이 느껴진다.  간단하게 재계약이 실패했다,라는 걸로 마무리될 수 없는 이야기들이. 《백의 그림자》의 무재는 이렇게 말한다. '언제고 밀어 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 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p.115)



누군가의 구체적인 생활이 마음에 스며들면 더는 단순하게 압축할 수 없었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 유곤이 성경을 들고 쥐며느리를 노려보는 모습, 오무사 할아버지가 '제비 새끼 주둥이에 뻥 과자 주듯'(p.103) 봉투에 전구를 떨어뜨리는 모습, 여 씨 아저씨가 그림자를 따라가다 차마, 하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는 모습, 은교와 무재가 점점이 이어지는 가로등 불빛 아래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모습, 그리고 누군가의 그림자가 그들의 뒤를 따라가는 모습.     



내 친구의 동료들은 어디서 일을 할 수 있을까. 이들이 일을 잘 구해야, 아이들 학비도 내고 먹고 살 수 있을 텐데. 소설 속에서처럼 만약 현실에서도 현실의 폭력 앞에 견디지 못하게 될 때 그림자가 솟는다면, 부디 이들의 그림자가 솟아나 자신과 분리되지 않기를 소망한다. '그림자가 들락거려 혀가 검게'(p.70) 물들어버릴 입을 상상만 해도 나는 몹시 슬퍼진다. 



#민음사 #소설추천 #황정은사랑해요 #대체텍스트 #북스타그램 #서평 

(대체 텍스트, 사진 설명) 회색 천 위에 책이 왼쪽으로 비스듬히 놓여 있다. 책 오른쪽에는 유리구슬이 네 개 있다. 책 표지는 흰색이고, 중앙에 빨간색으로 여자의 실루엣이 그려져 있다. 여자의 발아래쪽으로 하늘색 그림자가 늘어져 있다. 책 표지 우측 상단에는 제목인 '백의 그림자'가 있고, 좌측 중앙에는 '황정은 장편소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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