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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 May 23. 2023

그럼에도 삶은 계속 이어진다

황정은의 《연년세세》를 읽고

#연년세세 #황정은



미아 한센뢰베의 영화 「다가오는 것들」을 기억한다. 포스터에는 40대로 보이는 여성과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성이 사랑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을 주었는데, 영화는 로맨스와 거리가 멀었다. 주인공 나탈리에게는 보통 힘들고 괴롭다고 이름 붙일 법한 일들이 계속 '다가온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남편도 애인이 생겨 집을 나간다. 나탈리의 책은 전집에서 빠지고, 아끼던 제자는 나탈리가 사상과 행동의 일치가 되어있지 않다고 따진다.



그렇다고 나탈리가 온갖 고난을 극복하는 서사였나,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용기나 희망, 화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영화가 아니라고 느꼈다. 나탈리의 의지에 상관없이 그의 인생에 자꾸 '다가오는 것들' 안에서 살아내는 이야기였다. 소설 속 하미영의 말처럼 '그렇게 하지 않아도 삶은 지나간다 바쁘게. 나탈리는 바쁘게. 울고 실망하고 환멸하고 분노하면서, 다시 말해 사랑하면서.'(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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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 작가님의 《연년세세》에서도 주인공들의 삶은 바쁘게 지나간다. 자기를 공부시켜주겠다던 친척은 이순일을 식모처럼 부리기만 했고, 한영진은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어려운 살림을 경제적으로 책임져야 했다. 한영진은 왜 자기를 남자형제인 한만수처럼 자유롭게 풀어주지 않고 집에 묶어뒀는지에 대해 '끝내 말하지 않는'다. 한영진은 이순일을 '용서할 수 없고', 이순일도 말을 꺼내지 않는다. '용서를 구할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엔 있다'(p.142)는 것을 이순일은 알고 있다.



이해를 구하지 못하는 것들. 끊임없이 다가오지만 그저 무지르며 살아가야 하는 것들. '현명하고 덜 서글픈 쪽을 향한 진리.'(p.82)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살 수 없다는 피 맛 나는 진실. 소설은 나에게 살아가면서 모든 일을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말했다. 눈물이 나고, 화가 나고, 미움이 솟고, 결코 용서할 수 없게 되더라도. '연년세세'. 삶은 지나간다. 여러 해를 거듭해서 계속 이어진다. 




#창비 #책추천 #대체텍스트 #북스타그램 #서평 #황정은사랑해요


(대체 텍스트, 사진 설명) 상아색 천 위에 <연년세세> 책이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놓여 있다. 책 상단 중앙에 솔방울 하나, 책 위쪽에 솔방울이 하나 있다. 책 표지는 초록색이고 천을 성기게 엮은 것처럼 오돌토톨한 질감이다. 책 표지 상단 우측에 세로로 '연년세세 年年歲歲', 책의 하단 절반을 차지하는 띠지는 연한 황토색이고, '잘 살기. 그런데 그건 대체 뭐였을까, 하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나는 내 아이들이 잘 살기를 바랐다. 끔찍한 일을 겪지 않고 무사히 어른이 되기를,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랐어. 잘 모르면서 내가 그 꿈을 꾸었다. 잘 모르면서.'가 쓰여 있다. 책 띠지 우측 하단 구석에 출판사 로고인 '창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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